파리에서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생전 처음 미슐랭가이드 스타 식당에 가본 것이었습니다. 퓨전 일식의 점심 식사 코스요리가 나오는 곳이었는데, 먼저 식당에 들어가면 리셉션의 종업원이 코트를 받아서 별도의 코트룸에 코트를 보관해줬습니다. 종업원을 따라 자리에 앉으면 각자 메뉴를 고르고 식사를 하는데, 식사 도중 주방장이 나와서 자신의 요리가 어땠는지 물어보는 점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음식도 괜찮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리셉션에 근무하는 종업원의 당당한 태도였습니다. 처음 식당에 들어가 코트를 받아주고, 식당을 나설 때 직접 코트를 입혀주는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프로라는 자세로 당당하게 서비스를 한다는 느낌을 받아 저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날 저를 비롯한 몇몇 일행들은 파리를 떠나 이른바 프랑스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루아르로 고성 및 와이너리 투어를 갔습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제가 일행 중 일부에게 제안을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루아르 지방에 멋진 고성이 많고, 와인도 저렴하면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좋은 와인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이동하는데 거리가 좀 있기는 했지만, 오래된 성에서 보이는 멋진 풍경에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열심히 가이드를 따라다녔습니다.
이동하는 도중에 프랑스 가정식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푸짐하게 나온 식사와 이어진 와이너리 투어에서의 시음으로 기분이 더욱 즐거워졌습니다. 10년, 20년 가까이 된 화이트 와인인데도 여전히 풍부한 향과 맛을 간직하고 있는데, 가격은 한 변에 4, 5만원 정도여서 역시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루아르 지방이 좋은 와인 산지라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배부르게 식사를 한 후 와인을 마셨더니 이동하는 차 안에서 졸음이 쏟아졌는데, 투어 중 가장 아름답다는 성에 도착하니 멋진 모습에 잠이 달아났습니다.
루아르 지방 투어를 마치고 파리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 되었고, 다음날 스위스로 이동해야 했기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해서는 강의를 듣고, 과제를 제출하며, 시험을 보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그렇게 바쁘게 1년을 보내고 나면, 1달 정도 일종의 겨울방학 같은 기간이 주어집니다. 연수생 중 어떤 부류는 이 기간 동안 시험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연수원에서 학회 활동을 했던 연수생들은 기관연수를 많이 가곤 하는데, 저 역시 사법연수원에서 인권법학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국제기구들을 방문하고, 틈틈히 여행도 하게 되었습니다.
학회원들이 업무 분담을 해서 방문할 국제기구들에 연락을 하고, 인터뷰를 준비하고, 숙소와 항공편을 예약하고, 숙소와 항공권을 예약하고… 등등 보람있고 알찬 연수 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체 일정은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있는 국제기구들을 방문하고, 자유시간에는 각자 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에는 2002년 군 제대 당시 배낭 여행 이후 처음이라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는 기대도 많이 됐습니다.
마침내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이상 걸려 파리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었더니 저녁이 다 되었습니다. 예약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에펠탑의 야경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파리를 여행할 당시 일들이 생각나 혼자 웃었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세느강을 내려가다보니 야간 조명을 비추는 주변 건물들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다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제 여행 시계가 다시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에는 파리에 있는 법원을 방문하는 시간을 갖고,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봤습니다. 대학생 시절 파리에 갔을 때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여름철 휴가기간과 겹쳐서인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보고 싶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다시 찾은 루브르 박물관은 다행히 전보다는 좀 한가한 편이었기에 더 여유있게 전시품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봤던 개선문은 다시 보니 그 위용이 더 커 보였는데, 전에는 차를 타고 그냥 스쳐 지나갔던 것들도 다른 시간, 다른 마음으로 보면 달라 보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화재로 소실된 노트르담 대성당도 이름난 장미창 스테인드글래스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재즈 클럽을 찾아 음악을 듣다 보니, 파리에서의 또다른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에는 루앙프라방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라오스 여행을 가기 전에 라오스 여행을 갔다온 분에게 가이드북을 선물 받았는데, 그 분이 루앙프라방에 대해서 극찬을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안식처 같은 곳이면서도,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곳이라고도 했기 때문입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푼 후 멋진 일몰로 유명한 푸시산으로 향했습니다. 해질녘이 되어서인지 계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산을 올라 조용히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좋은 위치를 잡고 바쁘기만 한 일상에서 벗어나 하늘이 노을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여유를 즐겼습니다.
푸시산에서 노을을 본 후 내려와 야시장을 둘러보고, 한 길거리 음식점에서 야식을 사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점이 특이했던 것이 마치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데, 그릇에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서 식당 주인에게 가져가면, 주인이 보고 계산해서 내야 할 금액을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각 음식이 얼마인지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혹시 바가지라도 쓰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직 라오스 주민들이 순수한 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적은 금액이 나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야식으로 배를 불린 후에는 방비엥에서 장시간 이동하느라 피곤해서 그런지 숙소에 가서 잠을 푹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탁발 승려들에게 공양물을 주는데 참여했습니다. 탁발 승려들에게 주기 위해 전날 산 사탕과 바나나를 들고 나갔는데, 특히 귀여운 동자승들이 있어서 가져간 것들을 다 줘버려서 나중에는 줄 음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여성이 자신이 갖고 온 밥을 대신 주라며 나눠주기에 고맙다고 말하고 줬는데, 막상 탁발이 다 끝나자 전날 산 사탕과 바나나보다도 많은 돈을 달라고 해서 좀 당황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좋은 일을 하고 아침부터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어서 돈을 주고 아침식사를 하러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오전에는 좀 쉬다가 루앙프라방에서 유명한 꽝시폭포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를 개조한 툭툭을 탔습니다. 40분 정도 논밭이 옆으로 펼쳐진 길을 달려 꽝시폭포에 도착하니 우기라 그런지 물이 많았습니다. 물이 고인 라군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여행객들도 많이 보였는데, 저는 수영보다는 폭포를 보고 싶어서 바로 위에 있는 폭포로 올라갔습니다. 폭포로 가니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물도 많고, 올라가는 길도 일부 유실되어 있었습니다. 더 가까이 가니 폭포 소리가 요란하고, 바위를 타고 진주처럼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시원하게 떨어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꽝시폭포의 멋진 광경에 폭포 앞에서 한참 멍하니 물방울들을 보다가, 같이 간 일행과 함께 루앙프라방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루앙프라방 시내에는 유명한 사원이 하나 있는데, 사원 안에 있는 나가 5마리 형상의 가마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명한 가마보다 사원 벽에 타일로 장식된 나무가 더 좋았습니다. 세계 여러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와 같은 느낌의 나무였는데, 거친 듯 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는 장식이었습니다.
라오스 가이드북을 준 분이 추천해 준 환타지아란 이름의 유명한 음식점이 있었는데, 인테리어도 독특하고 음악이나 조명도 몽환적인 느낌이어서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특히 신발을 벗고 야외에 놓인 쿠션 같은 의자에 편하게 누워서 비어 라오를 마시다보니 하늘의 별도 보이고,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순수했던 라오스의 여행 마지막 밤이 흘러갔습니다.
방비엥에 도착해서 첫날 묵은 숙소는 하룻밤에 3천원 정도 하는 숙소였습니다. 여러 숙소를 돌아봤는데, 놀랍게도 가장 싼 숙소는 하룻밤에 700원 하는 숙소도 있었습니다. 그 중 비록 에어컨은 없었지만 선풍기가 있는 나름 깔끔한 숙소를 골랐는데, 그 숙소에는 숙박객을 기다리는 다른 손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였습니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켰는데, 바닥에 뭔가 검은 것이 있기에 처음에는 무슨 무늬인가 생각했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바퀴벌레였습니다. 동남아시아에는 날아다니는 큰 바퀴벌레들이 있다는 말을 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그 바퀴벌레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퀴벌레와 함께 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닐봉지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바퀴벌레를 잡은 후 방 밖으로 나와서 풀어줬더니 후두둑 하고 진짜 날아갔습니다. 핵전쟁에도 살아남는다는 바퀴벌레… 지금도 잘 살고 있겠죠.
버스 여행으로 지쳤기에 푹 쉰 후 아침에 일어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방비엥은 다양한 액티비티로 유명하기 때문에 여행사를 찾아가 다음날 튜브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튜빙 예약을 한 후 음식점에서 맥주와 음식을 먹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콕 카오산로드에 가면 전세계 백수들이 다 모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방비엥은 그보다도 더한 히피들이 모여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음식점들이 명작이긴 하지만 오래된 미드 프렌즈를 틀어놓고 있고, 여행객들은 다들 반쯤 누운 자세로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안주를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음식값이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주문해도 한끼에 대략 3, 4천원 이내이고, 숙박료도 워낙 싸다보니, 장기간 머무는 여행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여유있게 여행하는 서양인들이 80% 가까이 되는 특이한 여행지였습니다. 음식점에서 프렌즈를 보면서 맥주 한 모금을 마시다보면, 달리 부러울 것이 없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사지 받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방비엥에서도 라오스식 마사지를 받았는데, 태국식보다 좀 부드럽게 마사지를 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예약한 튜빙을 했는데, 튜빙이란 것이 상류로 차를 타고 올라가서 강가에 내려주면 각자 튜브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7월은 라오스에서는 우기라 방비엥을 가로지르는 쏭강에 물도 많고 유속도 상당히 빨랐습니다. 처음에는생각보다 강물이 빨라 좀 걱정도 됐는데, 튜브를 타고 내려가다보니 적응이 되어서 좀 괜찮아졌습니다. 튜빙의 재미는 튜브를 타고 내려가면서 곳곳에 설치된 카페에서 던져주는 구명튜브가 매달린 밧줄을 잡고 올라가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튜브를 타고 2, 3곳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튜브를 타고 내려가는데,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곳으로 가보니, 다들 강물이 있는 쪽으로 점프하는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여행하던 동행이 한번 타보겠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 미끄러지지 않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다른 여행객들이 힘껏 밀어줬습니다. 신나게 날아가서 강물에 떨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상하게 강물 위로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저를 비롯한 여행객들이 다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강물 위로 올라왔는데, 그만 정신이 없었는지 던져준 구명튜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제 일행이 빠르게 흘러가는 흙탕물과 함께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강물을 떠내려가는 것을 보자,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강변을 따라 떠내려가는 일행을 따라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고, 구명튜브를 던져주는 역할을 하는 카페지기 소년도 카약을 타고 황급히 제 일행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5분 가까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다행히 카약을 타고 갔던 소년이 제 일행을 구해서 카약에 태우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물살이 너무 세서 수영을 하기는 어려워서 하늘을 본 자세로 그냥 힘을 빼고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카약이 와서 자기를 구해줬다고 했습니다.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도 다시 카페로 돌아가니 다들 박수를 치면서 환영해줬습니다. 저와 제 일행은 다시 튜브를 타고 내려가 하류까지 가서 튜브를 반납한 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숙소로 돌아온 후 제 일행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음날 하루종일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다음날에는 기운을 좀 차려서 경치 좋은 방비엥을 뒤로 하고 루앙프라방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제가 사법연수원에 다녔던 2011년에는 1학기가 끝나고, 한 달 정도 쉬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많은 압박을 받는 연수원 공부를 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시간이나 비용을 생각해 가까운 곳을 택해야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는 여러 번 갔었기에 이번에는 좀 생소한 라오스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라오스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많지 않은 곳이었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이라 실제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라오스에 가기 위해서는 베트남이나 태국을 경유하는데, 저는 돌아오는 길에 방콕 카오산 로드에도 가보고 싶어서 태국을 경유하는 항공권을 예매했습니다. 출발 전 라오스에서 같이 여행을 할만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니 라오스를 여행하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아 구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비엔티안에서 만나서 라오스 일정을 같이 할 수 있는 동행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국을 거쳐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에 도착했는데, 비엔티안 공항은 마치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방콕에서 비엔티안으로 가는 비행기도 작은 프로펠러기였는데,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공항 옆에 바로 붙어 있는 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비엔티안에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니 만나기로 한 일행이 있어서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가이드북을 보니 비엔티안에는 인기있는 프렌치 식당이 있었는데, 가보니 손님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단 가격을 보니 우리나라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가격이어서 송아지 혀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저도 생전 처음 시켜보는 메뉴라 맛이 어떨까 걱정이 됐지만 막상 먹어보니 쫄깃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아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저는 동남아시아에 가면 꼭 망고스틴을 사먹기 때문에, 시장에 들러 망고스틴을 사서 일행과 함께 망고스틴을 까먹으며 앞으로 여행 계획을 의논했습니다.
그렇게 여행 첫날이 가고, 다음날 본격적인 라오스 여행을 위해 방비엥으로 가는 미니 버스를 탔습니다. 방비엥은 다양한 액티비티로 유명한 곳으로, 제가 갔을 때만 해도 주로 서양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였습니다. 방비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홍수가 나서 도로가 물에 잠기기도 했는데, 버스 기사가 지금은 지나갈 수 없다고 하기에 내려서 주변 노점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30분 정도 지나자 다행히 도로에 고여 있던 물이 빠져서 다시 버스를 타고 거의 7시간 이상 걸려 간신히 방비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시아에서 푹 쉬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사색을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마시아를 떠나 마지막 목적지인 이스탄불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이드북에는 대략 9시간 정도 걸린다고 써있었는데, 실제 버스를 타보니, 밤까지 운행을 해서 그런지 1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장거리 운행이다보니 중간중간 2시간에 한번 정도 휴게소에 들렀는데 휴게소에서 간단한 간식을 사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버스를 타다보니 밤이라 잠이 들었는데, 머리를 한쪽으로 숙이고 잤는지 반대편 목이 너무 아픈 것이었습니다. 잠이 깨자 너무 뻐근하고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시 휴게소에서 몸을 좀 풀고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의 불이 꺼지자 다시 잠이 오길래, 이번에는 반대로 머리를 숙이면 좀 나을 줄 알고 그렇게 잤더니, 다음날 새벽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머리를 좌우 어디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목 전체가 아팠습니다. ㅜㅜ
목을 주무르면서 풀고 있는데, 잠시 소란스럽더니 경찰이 버스에 탑승해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제가 타고왔던 버스의 여승객이 버스 기사에게 자신이 잠이 든 사이에 옆에 있던 남성이 자신을 만졌다고 경찰을 불러달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기사는 이스탄불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지 않고, 터미널에 연락해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여승객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였는데, 경찰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고, 경찰이 해당 남성을 데리고 내렸습니다. 터키는 세속주의국가이긴 해도 이슬람국가라 성범죄에는 엄격하게 처벌하고, 특히 관광수입 비중이 높아서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중대하게 본다고 합니다.
이스탄불에 오는 버스에서 친해진 승객이 몇명 있었는데,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다들 배가 고팠는지 함께 이스탄불 터미널 근처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승객 중 1명이 자신이 자주 간다는 현지 식당으로 데려갔는데, 관광객 상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았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저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 근처 숙소로 가서 짐을 놓고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먼저 고대부터 수많은 문명이 거쳐갔던 보스포러스 해협을 보러 갔습니다. 터키에서 유명한 돈두르마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보고 있자니, 이 곳을 얼마나 많은 영웅들, 정복자들, 상인들, 노예들이 지나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사소한 일에는 좀 더 대범해져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지는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러스 해협을 본 후에는 주변의 갈라타탑을 둘러보고, 술탄 마흐메트 광장 주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술탄 마흐메트 광장 벤치에 앉아서 본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는 내일 방문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했습니다.
터키에 진출한 한국 치킨 브랜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야 소피아(소피아 대성당)부터 방문했습니다. 늦게 가면 관광객들이 많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서둘렀는데, 역시 아침부터 관광객들은 많았습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이자 심장인 이스탄불을 점령하고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고, 모스크로 개조했다는 아야 소피아는 명성에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특정한 종교나 시대,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블루 모스크는 아야 소피아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의 카바 사원 첨탑처럼 6개로 되어 있어 건축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합니다. 내부는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푸른 타일을 만나 푸른색 파스텔로 칠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블루 모스크 다음에는 토프카프 궁전을 갔는데, 섬세한 조각들로 가득한 방들과 잘 정돈된 정원들이 미로처럼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터키에 가서 꼭 마시고 싶었던 와인이 있었는데, 로마의 카이사르가 폰투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 원로원에 베니(Veni), 비디(Vidi), 비치(Vici)라고 쓴 편지를 보내며 마셨다는 토카트(Tokat) 지역산 와인이었습니다. 아마시아로 가는 길에 버스가 토카트를 지나갔는데, 정차는 하지 않아서 미처 와인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 와서는 와인을 많이 마실 것 같은 이스탄불 대학교 근처 주류점들을 싹 뒤졌는데, 열군데 가까운 주류점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토카트산 와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토카트 와인을 같은 숙소에 머물던 다른 여행객들과 그 역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눠 마시면서 터키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만끽했습니다.
다음날에는 500년도 더 된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서 구경을 하면서 기념품을 산 후 아쉬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꿈꿔왔던 터키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터키 공항에서 마지막에 산 터키 전통술 라크는 45도 정도 되는 증류주인데 물을 섞으면 하얗게 되어서 ‘사자의 젖’이란 별명도 갖고 있습니다. 이 술을 사법연수원 입소한 후 회식 때 가져갔는데, 술을 잘 못 마시는 젊은 연수생들은 마시기 힘들어했던 기억도 납니다. 미안해요~~ ㅎㅎ
넴룻산에서 만난 여행 친구들은 카파도키아 여행 후 서쪽 앙카라를 향해 출발했고, 저는 북쪽으로 가게 되어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이드북에서 오래 전 폰투스 왕국의 수도였던 아마시아라는 도시가 터키 사람들도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라는 글을 읽고, 쉬어가는 여행지로 삼기로 했습니다.
카파도키아에서 아마시아로 가는 길에는 캉갈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은 캉갈이라는 개로도 유명하고, 한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닥터 피쉬로도 유명한 곳이라 한 번 들러 보기로 했습니다. 캉갈에 도착하니, 우리 진돗개처럼 캉갈이라는 지명이 품종명이기도 한 캉갈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명 ‘늑대잡는 개’라고도 불리는 용맹한 캉갈개는 덩치도 크고 늠름하게 생겼습니다. 온천에서 산다는 닥터 피쉬가 캉갈에서는 노천 온천이 있어 길가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닥터 피쉬를 체험해보려고 이곳저곳 물어보고 다녔는데, 우리처럼 관광상품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찾지 못했고,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찾는다는 일종의 요양원 같은 곳을 간신히 찾아 체험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수영복을 입고 온천수에 들어가니 닥터 피쉬들이 온 몸 여기저기 붙어 뽀뽀(?)를 하는데, 처음에는 재미있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습니다. 특히 발에 많이 붙어서 발가락을 꼬물꼬물대면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발가락에 붙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원조 닥터 피쉬들을 체험하고, 다시 아마시아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중간에 캉갈에 들르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돼 아마시아에 도착하고 보니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둘러 강변에 숙소를 구한 후 간단히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는데, 강변 맞은 편 절벽에 있는 옛 폰투스 왕들의 석굴무덤이 조명을 받아 너무 멋있었습니다. 잠시 배고픈 것도 잊고, 강변 난간에 기대서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석굴무덤을 쳐다봤습니다.
아마시아에서 첫날 밤은 이동하느라 피곤했는지 푹 자고, 다음날은 오전 늦게까지 숙소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강변에 나와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길래 간단하게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제 나이가 얼마냐고 묻길래 32살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저는 은근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고는 고맙다고 인사한 후 본격적으로 아마시아 시내와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시아 시내에는 멋진 자미(모스크)들도 있고, 볼 거리들이 많이 있는데, 자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손발과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족하는 곳에 갔더니 어떤 할아버지가 이렇게 하는 거라며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셔서 따라 씻고 자미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더니 작은 도시라 그런지 관광객도 거의 없고, 주로 주민들인 것 같은데, 한 구석에서 얘기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돌아다니기도 해서 저도 내부 구경을 했는데 조각이나 문양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약간 어두운 곳에 앉아 책을 읽다가 좀 졸립기도 해서 건물에서 나와서 자미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는데 다윗의 별 같은 흥미로운 조각들도 보였습니다.
밤에 보았던 절벽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절벽에 있는 길을 따라 무덤들 가까이 갔더니 상당히 높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무덤들을 보니 일부 무덤은 만들다 만 곳도 있고, 안타깝게도 대부분 입구를 철창으로 막아 놓아 무덤 내부는 구경을 못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에도 볼 거리들이 많고, 위로 올라가서 아마시아 시내를 보니 녹색강으로 유명한 아마시아답게 강과 산 시내가 어우러져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터키인들이 왜 아마시아에 와보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돌아다닌 덕분에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터키 음식이 세계 3대 음식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터키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들을 놓치지 않고 먹으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먹지 못했던 것이 양갈비 스테이크였습니다. 가이드북에 보니 양갈비 스테이크가 유명한 식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양갈비 스테이크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처음에는 약간 짠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이 나온 다른 채소와 음료수와 같이 먹다보니 짠 맛을 중화시켜줘서 잘 어울렸고, 다 먹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뭔가 아쉬웠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보니 식당 주인이 술을 팔지 말지 정하는데, 하필 그 식당은 술을 함께 팔지 않는 곳이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던 주류만 판매하는 주류 상점에서 터키의 유명한 맥주인 에페스를 산 후 숙소에 돌아가 창문을 열어놓고 전 날 밤처럼 멋진 야경을 즐기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전날 먹었던 양갈비 스테이크가 다시 생각나길래 부지런히 일어나 식당에 가서 가성비 좋은 만 오천원짜리 양갈비 스테이크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산정상에 있는 요새로 올라가보기로 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산책하는 느낌으로 올라갔는데 길 옆으로 보이는 풍경이나, 한참 올라간 후 보이는 아마시아 시내가 볼 때마다 멋졌습니다. 요새에 있는 카페에서는 차도 한 잔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다가 다시 시내로 내려왔습니다.
시내로 내려와서는 터키에 가면 꼭 가보려고 했던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을 찾아갔습니다. 입장할 때 이용료와 거품목욕료를 한꺼번에 내는데, 수건을 하나 걸치고 욕탕 안으로 들어가니 세신사가 먼저 몸에 물을 끼얹어 씻으라고 몸짓으로 설명을 해줬습니다. 일단 몸을 씻고 나자 따뜻한 돌 침대에 누우라고 한 뒤 수건으로 엄청난 진짜 엄청난 크기의 거품을 만들어 온 몸에 바르고 목욕을 시켜주는데, 끝나고 나니 기분도 상쾌하고 색다른 체험이라 다시 또 해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맘을 나와 다시 시내를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가니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첫째 날보다 조명을 받는 절벽의 무덤들이 더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넴룻산에서 만난 커플이 태워준 차를 타고 하루 종일 카파도키아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여행 전 중고 랜드로버를 산 후 차 위에 짐을 실을 수 있도록 개조를 했고, 차 위에 짐뿐만 아니라 장시간 주유소를 찾을 수 없을 것을 대비해 석유통까지 잔뜩 실었다고 합니다. 터키 오는 길에 시리아를 지나왔는데, 리터당 20센트 정도로 석유 가격이 매우 싸서 석유통을 잔뜩 채웠다고 은근 자랑도 했습니다.
아드야만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은 거친 산길과 황량한 들판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멋져 부지런히 사진도 찍고, 가끔 특히 멋진 곳에서는 차를 세우고 내려 잠시 주변 풍광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종일 비슷한 풍경이 계속되니 나중에는 좀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달려 어두워진 다음에야 겨우 카파도키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카파도키아에 도착할 즈음 숙소를 어디로 정할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 숙소가 시설도 괜찮고, 가격도 저렴하니 그 곳에 가자고 제안했는데, 커플은 론리 플래닛에는 그 숙소가 없는데 괜찮은 곳이 맞는지 약간 걱정스러워했습니다. 제가 사진이 없는 론리 플래닛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에는 사진도 나오고 자세히 설명이 나오니 믿고 한 번 가보자고 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진 탓에 숙소를 찾는데 약간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목적한 숙소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이 머물 방들도 오래 전 바위를 파서 만든 곳으로 시설도 좋아서 모두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차도 얻어타고 왔고,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한 커플을 위해 항아리 케밥을 비롯해 카파도키아의 유명한 음식을 제가 대접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술도 한잔하면서 커플이 어떻게 만났는지, 1년간 여행을 마치고 영국에 도착하면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겠다는 등 사연과 여행 중 재밌었던 얘기도 들었고, 저도 시험 준비를 했던 얘기, 터키 여행을 오게 된 과정 등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져 다음날 여행을 위해 각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러 가니 커플은 먼저 나와서 주변 산책을 했는데 너무 멋지다면서 저에게 혹시 계획한 일정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투어를 신청하거나 가까운 지역만 천천히 다닐 생각이었기에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하자, 그럼 자기들과 함께 카파도키아에서 유명한 곳을 돌아보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차를 타고 다니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니 좋다고 하면서 대신 식사는 제가 사겠다고 했더니, 어제 저녁도 아주 잘 먹었으니 괜찮다면서 일단 출발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넴룻산에서 만난 커플 덕분에 카파도키아에서도 지하도시, 유명한 괴레메 마을, 스타워즈 촬영지였던 으흘랄라 계곡, 이른바 버섯바위 공원 등 여러 곳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샨르 우르파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넴룻산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한참 타고 가다가 핀란드에서 산 살라미를 잘라서 먹고 있는데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가 제가 먹는 것이 뭔가 궁금한지 계속 쳐다 보기에 순록과 곰고기로 만든 살라미라고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해줬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살라미를 잘라서 아이 어머니에게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곰고기는 처음 먹어본다고 하기에 저도 처음이라고 말했습니다. ㅎㅎ
가이드북을 보니 샨르 우르파에서 넴룻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드야만이라는 도시에서 넴룻산 투어를 구할 수 있다고 하여 아드야만행 버스를 탄 것인데, 가는 길에 보이는 들판과 넓은 호수의 풍경이 멋져서 다른 여행객들처럼 저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습니다.
아드야만에서 숙소를 구한 후 숙소에서 넴룻산 투어가 가능한지 알아보니, 제가 여행을 간 시기가 겨울이라 일반적인 넴룻산 투어는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적으로 차량과 가이드를 렌트해서 넴룻산과 주변의 콤마게네 왕국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혼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하니 가격도 매우 비쌌는데, 그렇다고 거기까지 가서 넴룻산을 안 올라갈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용을 지불하고, 투어를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넴룻산을 등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날은 저녁을 든든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에 준비를 하고 나가보니 택시가 한 대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택시 기사가 택시를 몰고 하루 종일 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넴룻산 높이가 2,150미터 정도 되는데 그 정상에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그 높이를 다 등산해야 하는 줄 알고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로부터 다행히 택시가 한참을 올라가서 정상 부근에서부터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올라가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원래 겨울에는 찾아오는 여행객이 없어서 입장료도 받지 않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기뻤던 것도 잠시, 막상 입구에 도착해보니 관리자 뿐만 아니라 여행객도 하나도 없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눈이 종아리 높이까지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달랑 트래킹화에 편한 복장으로 올라간 저는 깜짝 놀래서 기사한테 저길 올라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기는 택시에서 기다릴테니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비용도 다 지불했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혼자서 눈 덮인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눈 덮인 넴룻산과 정상의 안티오코스 1세 무덤
아 근데… 진짜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산길을 계속 혼자 올라가다보니 이러다 조난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겁도 나고, 무엇보다 눈이 많아서 계속 발이 빠지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당시 물도 제대로 챙기지 않아서 200ml짜리 음료수 하나와 초코바 하나 정도만 가지고 올라갔는데, 1시간 정도 지나니까 너무 목이 마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음료수를 다 마시고 계속 올라갔는데 나중에는 지쳐서 그냥 내려갈까 고민을 계속 하다가 쌓여 있는 눈이라도 먹자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파헤쳐 안에 있는 나름 깨끗한 눈을 손으로 퍼서 먹으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저는 쓰러질 것 같이 힘들었지만 기진맥진한 상태로 정상 근처에 도착하니 매점 같은 건물이 보였습니다. 살았다!!! 하는 생각으로 가까이 가보니 실망스럽게도 매점도 문을 닫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테이블과 의자가 있기에 그 곳에 앉아서 초코바를 먹으면서 쉬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여행객 2명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깊은 산 속에 홀로 있는데 사람을 보니 얼마나 기쁘던지 그 여행객들을 기다려 같이 올라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잠시 쉬면서 힘을 회복했는지, 다른 여행객들을 보고 힘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여행객들이 제가 쉬고 있는 매점 근처로 오자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여행지에서 항상 하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 어디를 갔었냐 등등 얘기를 하다보니 이 여행객들 2명은 커플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차를 몰고 6개월에 걸쳐 아프리카를 종단하고, 중동을 지나 터키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다시 무덤을 향해 함께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무덤에 도착해보니 일부 석상들이 눈에 묻혀 있기도 하고, 무덤 위로 올라가는 길이 전부 눈에 덮혀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힘들게 올가가는데, 위에는 눈이요, 아래는 자갈 같은 작은 돌들로 60미터 가까이 쌓아 놓은 지라 발이 자꾸 빠져서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지쳐서 주저앉기도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순간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로 멋진 풍경에 그렇게 고생해서 올라간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상에 앉아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같이 올라왔던 커플이 아래에 있는 석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반대편에 있는 석상들은 몸통 부분이 훨씬 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보여 저도 내려갔더니 커플이 제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고 좀 더 얘기를 나눴는데, 알고보니 그 커플은 결혼을 약속하고 남아프리카 태생 남자가 차를 몰고 여행을 하면서 애인인 여자친구의 부모가 살고 있는 영국까지 가는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페트라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우와…
1시간 반 정도 커플과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남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경기장 설계를 맡았던 사람으로, 2년 가까이 거의 쉬지도 못 하고 일만 했는데, 월드컵이 끝나자 휴직을 하고 여자친구와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감탄을 하자 자기도 1년이나 걸리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걱정도 많이 되었는데, 막상 닥치면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제가 몇 년 전부터 터키 여행을 오려고 했는데, 사법시험에 작년에 합격해서 이제야 왔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처음 출발했던 입구 가까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커플이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기에 카파도키아로 간다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 곳으로 간다면서 제가 원하면 자기 차에 같이 타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뜻밖의 제안에 고마워 생각해보겠다고 했더니, 제가 머무는 숙소가 어딘지 알려달라기에 숙소 위치를 알려줬더니, 자신들이 그 앞을 지나갈테니 내일 오전 7시까지 숙소 앞으로 나오면 자신들이 픽업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커플이 좋은 사람들 같아 보여서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입구에서 커플과 헤어지고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다행히 택시 기사가 저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택시에 타자 어땠냐고 하기에 아주 힘들었지만, 올라가니 또 아주 좋았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유적들을 둘러볼 생각이냐 아니면 숙소로 갈 것이냐고 묻기에 좀 피곤하긴 했지만 이왕 투어를 시작했으니 예정대로 가자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산골 깊은 곳으로 차를 몰고 출발하는데, 마치 영화에 나오는 요정들이 사는 세상 같은 풍경도 보고, 옛 왕국의 유적들도 보면서 하루를 알차게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고대 유적을 간직한 하산 케이프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샨르 우르파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메드야트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슬람국가인 터키에서 특이하게도 기독교도들이 다수인 도시라고 했습니다. 버스를 메드야트에서 갈아타야 했기에 버스표를 사고 보니 출발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진짜로 십자가가 있는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건물 자체도 오래되고, 조각도 되어 있어 유심히 보다가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습니다.
메드야트 교회
국토가 넓은 터키에서는 오랜 시간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 기차보다는 버스 노선이 발달해 있고, 버스도 주로 메르세데스 벤츠사 제품으로 버스 안에 화장실까지 있을 정도로 시설도 좋기 때문입니다. 특히, 버스를 타면 출발하기 전에 손에 손세정제를 뿌려주는데, 그 향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의 버스 탑승 시간을 버티면서 샨르 우르파에 잘 도착했습니다.
샨르 우르파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샨르 우르파 성에 가서 아브라함 사원과 연못을 살펴본 후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참새떼가 까마귀들과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까마귀들이 참새들을 쫓자 엄청난 수의 참새들이 무리를 이뤄서 까마귀들과 대항하는데 결국 까마귀들이 물러나버린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약한 새들이라도 힘을 합치면 힘센 새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샨르 우르파 성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으려고 현지 식당들을 돌아보다가 손님이 많은 곳으로 들어갔는데, 식당 사장님과 손님들이 말을 걸어와서 식사를 하면서 손짓발짓까지 섞어 가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들 사진도 찍어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내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자신의 집에까지 초대를 해서 집에도 갔었는데, 아쉽게도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샨르 우르파에서는 먼저 박물관에 갔는데 스핑크스를 닮은 조각상과 프레스코화도 있고, 모자이크화도 많이 있었기에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 중에는 1만 2천년 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굴된 것 같은 거대한 기둥들도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다 둘러본 후에는 박물관에서 도시 근교에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고 해서 발굴 현장에도 찾아갔습니다. 박물관 뿐만 아니라 발굴 현장에도 제가 좋아하는 모자이크화가 많아서 발이 아픈 것도 잊고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