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2

지난 글에 이어 군 제대 후 유럽배낭여행 당시 일화입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북유럽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 한인민박집에 머물던 어느날 저녁 6개월째 배낭여행 중이라는 형을 한 명 만났는데 다음날 백야를 보러 북극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체코 가는 기차에서 만난 할머니가 추천해준 체스키 크롬로프를 갔다가 독일에 오래 머물 생각이었는데, 백야와 북극이란 단어가 저를 너무도 강렬하게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다가 일정을 전부 변경해 그 형과 북극에 가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노르웨이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일단 체코에서 우리가 가려는 노르웨이 나르빅역까지는 기차로만 2박 3일을 가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북유럽의 물가가 어마무시하다는 얘기를 전부터 듣고 있었던 우리는 일단 일용할 양식을 사서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커다란 식빵 2봉지, 2리터짜리 생수 2통, 살라미 1개, 딸기잼 작은 병, 맛있는 체코 맥주 5병(아무리 돈이 없어도 맛있는 체코 맥주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음)을 사서 기차에 탔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여행한 얘기도 하고, 빵에 잼을 바른 후 살라미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꼬박 기차를 타고 스웨덴 국경을 통과해 올라갈 때가 되니, 점점 지루해지고 식빵만 먹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더구나 스웨덴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아 크로네만 사용할 수 있어 스웨덴에서는 물건도 전혀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스톡홀름에서 사철(사기업이 운영하는 기차)을 타고 나르빅에 가는데, 문제는 유레일 패스로 기차를 탈 수는 있는데 좌석 예약은 불가능해서, 좌석이 없는 경우 서서(!!)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야 어찌어찌 타고 가더라도 문제는 밤에 잠을 잘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동행한 형과 저 모두 한창 젊은 나이라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객실에는 자리가 없으니 승하차하는 계단이 있는 복도에 침낭을 깔고 자기로 했습니다. 당시 기차에 타고 내리는 다른 승객들이 좁은 공간에서 한국인 2명이 침낭에 들어가서 계단을 피해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지 지금도 궁금하긴 합니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기차만 타고 도착한 노르웨이 나르빅은 유럽 최북단 기차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로포텐 제도까지는 다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기차에서 내렸는데, 저 앞에서 왠지 한국인 같은 여성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배낭을 메고, 하나같이 머리에 천으로 된 정글모자를 썼는데, 당시 유럽에서 그런 모자를 쓴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까지 오는 다른 한국인들도 있구나”하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하고 보니, 그 분들은 학교 선생님들이었는데 그분들도 마찬가지로 로포텐 제도에 가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의기투합한 우리 일행은 함께 마트에서 연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연어가 엄청나게 비쌌는데, 거기선 연어 1마리를 살만 발라 포장한 상품이 1만원 정도 였음)를 비롯한 식료품을 사서 유람선을 탔습니다. 북해의 찬 바람을 가르고 로포텐 제도에 도착한 후 백야를 보면서 연어로 스테이크도 굽고, 샐러드 해 먹고, 연어 라면도 끓여먹은 후 캐러밴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북해의 바람을 가르며 로포텐 제도로 가는 유람선에

백야에는 새벽 3시 정도까지 온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데, 그 시간이 지나 5시 정도면 어두워지기보다는 하늘이 다시 밝아지면서 새벽이 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백야라도 잠을 자야하니 아주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잔다는데 우리는 백야를 감상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다음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계속 졸아야 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는 원주민들이 벼룩시장을 열기도 하는데, 거기 걸려 있는 하얀 북극여우 가죽을 16만원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원주민들에게만 사냥을 허용한다는데 어머니 선물로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제 입장에선 비싸기도 하고, 올무로 잡느라 여우 발 하나가 없어서 마음이 좀 그렇기도 해서 결국 사지는 못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 나와서는 게이랑게르 피요르드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유람선을 쫓아오는 갈매기들에게 빵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영종도 가는 유람선에서 던져준 새우깡을 잘 받아먹는 우리나라 갈매기들처럼 노르웨이 갈매기들도 빵을 뭉쳐 던져주면 잘 받아먹는 것을 보고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브릭스달에서는 빙하기에 다 녹지 않은 빙하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캔디바 같은 색이어서 신기했는데, 가까이 하니 원래 하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등산하다가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는 것처럼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다른 여행객이 그 물에 수만년 전 빙하에 들어갔던 박테리아가 있을지도 모르니 마시지 말라고 해서 얼른 뜬 물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계곡 위로 올라가니 빙하 조각이 떨어져 나와 물에 둥둥 떠있길래 제가 얼른 위에 올라탔는데 빙하가 밑으로 쑥~ 가라앉았다가 다시 위로 떠올라서 주변 여행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여행을 하는 동안 정부가 카페, 유랑선, 마트 등 사방에 설치해 놓은 슬롯머신을 보면서 무료한 삶에 대한 위안거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바로 앞에서 2번이나 큰 금액이 당첨되어 마트 쇼핑 바구니에 동전을 쓸어담는 것을 보고 당첨확률이 높다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했던 형이 당첨 운이 있는 편이라길래 함께 돈을 모아 슬롯머신을 하기도 했는데(우린 당시 슬롯머신을 줄여 ‘땡김이’라고 부르기도 했음), 한번은 슬롯머신으로 약간의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여행경비에 충당하기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1만원짜리 빅맥세트보다 비싼 11,500원짜리빅맥세트를 파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저는 배는 다소 고프더라도 북유럽의 앞선 기술, 여유있는 삶의 태도, 수준 높은 공공인프라 시설에 감탄하고, 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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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1

제가 성년이 된 후 최초로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2002년 여름이었습니다. 군대 말년 휴가를 나와서 비행기표와 여행준비를 다 한 후 제대 3일 후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서 다시 사회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행 경비는 제가 어렸을때부터 모았던 돈으로 준비했는데, 대학생이다보니 돈을 아껴쓰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저렴한 한인민박집에 자주 묵었는데, 혼자 여행을 하던 때라 예약을 잘 하고 다니지 않아서 방이 없는 경우에는 소파에서 절반 정도 숙박료만 주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럽배낭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도시와 국가를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을 잘 하는 것으로 쳐주던 시절이라, 45일 되는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을 이른바 반시계 방향으로 열심히 여행했습니다.

제가 유럽에 도착했을 때가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한 직후여서 유럽 여행 중에도 월드컵 응원을 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갔을 때는 혹시 이탈리아 사람들과 축구 얘기하다가 싸우기라도 할까봐 이탈리아 대표팀 토티가 축구를 잘 한다고 칭찬하고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처음 혼자서 간 해외 배낭여행이라 인상 깊어서 그런지 지금도 여행 당시 있었던 일들이 많이 떠오르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몇 가지만 적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저의 파리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망쳐놨던 파리 뒷골목 불량배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런던에서 TGV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10시 반도 안 됐는데 지하철 운행이 종료됐다면서 다 내리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왜 그 시간에 운행이 종료됐는지 의아하지만, 일단 내리라니 내렸는데 생판 모르는 지하철역으로 나와 보니 숙소와 너무 멀었습니다.

2002년에는 지금처럼 여행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이드북에 의지해 여행을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숙소를 찾아가려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군대 제대 후 보름도 되지 않았던 때라 걷는 것 하나는 자신있어서 지도를 보면서 거리에 적힌 도로명과 맞춰가면서 대략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다 보니 지름길을 찾아간다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사거리에 젊은 애들 여럿이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고, 그 옆 10미터 정도에는 경찰차가 경광등을 켜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당시가 여름인 7월초였는데 드럼통에 장작을 넣어 태우면서 파리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앉아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진짜 송아지만한 개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ㅎ

어쨌든 나는 얼른 숙소로 가고 싶어서 동네 양아치(?) 같은 사람들을 지나쳐 경찰에게 숙소 방향을 묻고, 경찰이 알려준대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오면서 그 사람들을 지나쳐 오는데, 그 중 2명이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쟤들도 저는 집에 가려나 하고 그냥 내 갈길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2명이 저를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모퉁이를 돌면서 슬ㅉ 보니 2명이 어슬렁어슬렁 저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머리 위로 자전거 체인 같은 것을 빙빙 휘두르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좀 웃기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걷는데는 자신이 있었던 저는 만일, 내가 뛰면 그 애들도 뛸 거 같은데, 달리기가 제가 더 빠를지 장담할 수가 없어서 일단 빨리 걷기로 했습니다. 일단 옆으로 메는 가방을 몸에 바짝 붙이고, 최대한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도 따라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이 따라오는 것이 힘들었는지 갑자기 영어로 F*** y**, G** D*** 등 큰 소리로 욕을 막 하면서 저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한 직진만 했더니 결국 3분에서 5분 정도를 따라오다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좀 황당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선 좀 무섭기도 한 일이라 저는 그 다음날 계획했던 파리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바로 파리를 떠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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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행의 동반자들

여행가방들과 여행용품들

가장 왼쪽의 등산배낭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짊어지고 국내외를 누비던 시절에 함께 했습니다.

이베이를 통해 캐나다에서 중고품으로 구매했는데, 신품같이 깨끗해서 좋았고, 일단 배낭을 짋어지면 무게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에 밀착이 되어서 감탄했습니다.

최근 해외여행에 가지고 다니는 가운데 여행용 캐리어는 등산배낭을 메고 다니다보니 무리가 되어서 이제는 짐을 끌고 다녀야 되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구입했습니다.

짧은 여행시 가지고 가는 오른쪽 작은 배낭은 사법시험 준비하던 시절 책가방이었는데 이제는 짧은 여행의 동반자로 쓰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가벼워서 때때로 등산을 할 때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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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상을 벗어난 자유의 공기

우리 가족들은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저도 어렸을 때부터 국내외를 많이 다녔습니다.

여행을 하면 견문이 넓어지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서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서는 제가 성년이 된 이후 여행을 한 곳들에 대한 기억들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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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철, 변호사로 의미를 남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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