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2014년은 앞으로 오랫동안 세월호 사건으로 기억될 해일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세월호 사건에 관여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구성한 세월호 법률지원단에 참여해 세월호 사건 관련 증거보전을 위한 재판에 함께 했고, 충북 오창에 있는 M사에서 이루어진 세월호 CCTV 복원 작업을 위해 서울과 오창을 많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또 더운 한여름에 종종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 대한 지원을 하느라 좀 지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를 길게 가지는 못 해도 잠시 바람을 쐬고, 휴식을 취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즐겨 읽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경주에 있는 불국사, 남산, 석굴암, 안압지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시간이 되면 경주의 문화유산들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이번이 혼자서 국내여행을 할 만한 기회라 얼른 경주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예약을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숙소를 찾아 짐을 푼 후 조용히 주변 지역을 돌아봤습니다. 여름 휴가철이지만 숙소가 좀 낡아서 그런지 숙박객이 많지는 않았는데, 냉방시설이나 침대는 잘 갖춰져 있어서 오히려 푹 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천천히 나가서 불국사를 둘러봤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어렸을 때 갔던 불국사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석가탑은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가건물로 석가탑 전체를 둘러싸고 석재들을 옮겨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잠시 다보탑과 불당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나오셔서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복되는 장단과 웅장한 소리에 취해 넋놓고 법고 소리를 듣다가 주변이 점점 어두워져서 서둘러 불국사를 나왔습니다.
불국사를 나와서는 안압지로 향했습니다. 밤에 조명을 받은 안압지가 멋지다고 해서 어두운 내천을 따라 가는데, 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어둠 속 저 멀리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니 안압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밤이라 그런지 안압지에는 방문객이 많지 않았는데, 조용히 산책을 하면서 멋드러지게 조명을 받은 모습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안압지에서 야경을 즐기다 경주 황남빵을 하나 사들고 숙소로 걸어갔습니다. 조용한 거리를 혼자 걷다가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숙소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경주 남산 등산을 위하 딱 한잔만 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늘이 꾸물꾸물하니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좀 불안해서 우산을 가지고 길을 나섰습니다. 삼릉숲을 거쳐 남산을 올라가다 보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온 것처럼 곳곳에 불상과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계곡 곳곳을 둘러보며 올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남산을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내리기 시작한 비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어느 순간 폭우로 바뀌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비에 산길을 재촉하는데 나중에는 길에도 물이 넘치고, 어디가 어디인지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바람이 쳐서 우산을 썼는데도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처럼 속옷까지 완전히 다 젖었습니다. 급해지는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어차피 다 젖었으니 안전하게 하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늦추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을 차분하게 먹으니 길을 잃지는 않아서 원래 계획했던 하산길로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칠불암 마애석불을 찾아 가다 보니 다행히 이정표가 보였습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니 좀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정표가 보이니 마음이 안정되고, 힘이 났습니다. 쫄딱 비에 젖은 상태로 칠불암에 도착하니 감사하게도 스님 한 분이 암자에 들어와서 차 한잔을 마시고 가라고 권해주셨습니다. 스님이 타주시는 따뜻한 율무차 한 잔에 있던 몸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칠불암은 비구니 암자였는데, 저 이후에도 다른 등산객들이 암자에 와서 같이 율무차를 마시면서 어떻게 남산에 오게 됐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늦은 오후라 스님이 공양을 준비하시다가 식사를 못 했으면 같이 하자고 하시기에 몇 번 거절하다가 염치없게 밥 한끼를 얻어 먹게 되었습니다. 따뜻하게 밥 한공기를 먹고 나니 몸도 따뜻해지고, 다시 힘이 났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 한 후 빗줄기도 다소 약해졌기에 다시 칠불암을 나서 옆에 있는 국보 마애석물을 보러 갔습니다. 마애석불이 좀 전에 지쳐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가더니 이제는 다시 힘이 나냐고 눈빛으로 묻는 듯 했습니다.
마애석불을 지나 하산을 하다보니 염불사지와 잘생긴 염불사 삼층석탑이 보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에는 비가 더 오다말다 했는데, 그래도 산 정상에서 쏟아지던 비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큰 길을 찾아나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니 피곤했는지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숙소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비로소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잠이 쏟아져서 한숨 자기로 했습니다.
Views: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