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평화로운 정적이 흐르는 곳 3

평소 한국에서나 여행을 가서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비몽사몽인 제게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본다는 것은 나름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침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저라도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곳이자, 환상적인 일출 명소인 앙코르와트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들면 좋은 자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기사를 불러 앙코르와트로 출발했습니다. 앙코르와트 입구에 내렸더니 아직 새벽이라 깜깜하기에 휴대폰 라이트를 켜고걸어가는데, 저와 같은 관광객들이 많은지 마치 반딧불처럼 여기 저기서 하얀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하구나 하고 혼자 웃기기도 했습니다. 앙코르와트 입구를 지나면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수면에 3개의 탑이 비쳐 가장 아름답다는 일출 명당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점점 일출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늘어나더니 제 앞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까지 나타나서,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이제 옆 사람은 잠시 잊고 점점 커지면서 눈부시게 빛나는 해와 데칼코마니처럼 연못에 비친 탑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구름 뒤로 숨고, 세상 전체가 밝아진 후 저도 자리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앙코르와트 내부를 꼼꼼히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원 내부 1층 회랑에는 제가 좋아하는 인도의 2대 힌두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에 관한 부조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조각된 이야기에는 신들과 악마인 아수라, 천상의 무희들인 압사라 뿐만 아니라 영웅들과 왕들까지 등장해 다양하고 화려했습니다. 오늘은 빨리 가자고 눈치를 주는 가이드도 없어서 조각들을 하나씩 여유있게 감상하면서 사진으로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1층 회랑의 조각들을 살펴본 후에는 사원의 담 안쪽의 넓은 공간으로 나갔습니다. 조각들로 가득한 회랑을 계속 돌다가 널찍한 마당으로 나오니 분위기도 밝고, 가슴도 탁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안에 있을 때는 잘 알지 못했는데, 밖에서 바라보니 사원의 회랑과 벽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사원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사원의 중심부를 향해 가는 통로의 벽에도 조각들과 신상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에 있는 탑은 주위를 둘러싼 여러 가파른 계단 형태 중 실제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만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데, 철제 계단으로 보다 오르기 쉽게 만들었음에도 경사가 급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높은 곳은 아무래도 멀리까지 보여 경치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줄줄이 비엔나처럼 줄을 서서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중앙탑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중앙탑에 오르느라 힘이 들었는지, 오전 8시가 되기도 전인 이른 아침인데도 얼굴에 땀이 났습니다. 탑 상층부에 올라서 돌아보니 여기에도 이곳저곳 아름다운 조각들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는 불상의 광배를 나가 형상으로 만든 것이나 천수관음처럼 여러 손이 조각된 신상이 특이해보였습니다. 사람들 틈새를 헤치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창문쪽으로 갔더니 역시나 높은 곳이라 그런지 사원 밖 저 멀리 숲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었습니다.

중앙탑에서 경치를 즐기면서 살살 부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나니,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졸음이 솔솔 몰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볼 것들은 어느 정도 봤다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가 잠을 보충하고, 느지막이 점심 이후에 일어나 호텔 수영장 한 켠에서 가져간 책을 읽었습니다.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던 호모 사피엔스였는데, 두어 시간 책을 읽다가 햇살이 다시 강해지길래 다시 방에 돌아가 책을 놓아둔 후 짐을 챙겨들고 마사지를 받으러 갔습니다.

저는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면 마사지를 자주 받는데, 이번에는 많이 걷기도 해서 마사지를 제대로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발마사지 레슨을 받고, 강습이 끝난 후에는 마사지를 받는 프로그램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마사지 레슨을 받는 곳은 처음 가봐서 여러 상품 중 마음에 드는 발 마사지 프로그램을 고른 후 1시간 정도 1:1 레슨을 받았는데, 강사와 서로 마사지를 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레슨 프로그램에는 마사지 교본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 교본을 보면서 나중에도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사지 레슨이 끝난 후에는 커피 껍질을 이용한 아로마 전신 마사지를 받았는데, 커피 껍질을 넣은 오일은 온 몸에 바르고 그 위를 비닐로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방식의 마사지를 많이 받아봤지만 마치 소세지 빵처럼 몸을 돌돌 감싸는 방식의 마사지는 처음이라 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돌아다녀서 노곤했는지 어느 순간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시간이 다 됐는지 마사지사가 저를 깨워서 레슨 때 받은 교본과 제 나머지 짐을 챙겨들도 다시 숙소로 향했습니다.

마사지를 받고 숙소에 와서는 푹 휴식을 취했는데, 이렇게 관광을 하고 휴식도 취하고 나니 학위 논문을 쓸 준비가 된 것 같아 알 수 없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저는 앙코르와트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주변 맛집에 가서 캄보디아 맥주와 캄보디아 전통 음식으로 기념했습니다. 다음 날 숙소를 나오는데 갑자기 호텔 지배인이 카드 한 장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나름 여행을 많이 했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카드를 직접 써서 주는 곳은 본 적이 없어 신기하면서도 은근히 기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카드를 보면서 많이 상업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순박한 캄보디아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귀국 비행기를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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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평화로운 정적이 흐르는 곳 2

점심을 먹고 잠시 그늘에서 더위를 식힌 후 수심이 별로 깊어 보이지 않은 저수지를 건너는 것으로 투어의 후반부가 시작됐습니다. 저수지 위에 널판지가 깔린 길을 걷다보면 섬이 하나 나오는데, 이 곳이 프라삿 닉 포안이라는 사원이었습니다. 좀 특이하게 이 사원은 작은 섬 위에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부처가 열반에 이른 것을 기리는 뜻으로 세워져서 4개의 연못에 둘러싸인 중앙에 있는 1개의 연못은 히말라야에 있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연못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가이드는 이 사원에는 코끼리, 사자, 말, 사람의 모습을 한 4개의 분수가 있는데, 이 분수에서 성수가 나와 병을 고쳐준다고 하여 순례자들이 찾는다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저수지 위를 걸어 돌아나와 다음 사원으로 이동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좋아하는 정교한 조각상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한 많은 조각상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기에 저는 각각의 조각들을 사진 촬영하느라 다시 빨리 오라는 가이드의 재촉도 못본 척 해야 했습니다.

정교한 조각상들을 많이 본 후에는 다시 이스트 메본 사원으로 향했는데, 원래는 저수지 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물이 모두 말라버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긴 했지만, 사원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 서있는 늠름하고 힘이 넘치는 사자상과 두툼하고 긴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원 위로 올라가니 여러 개의 탑이 있었는데, 탑에 사용된 석재가 다른 사원들보다 더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마치 대리석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좋은 재질 위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은 계속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게 했고, 벽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참 넋을 잃고 보고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다소 일찍 투어가 끝나 마지막 목적지인 일몰 명소인 프놈 바켕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곳들을 더 구경할 수 있는데 너무 일찍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다소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해가 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글들을 읽은 탓에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프놈 바켕 사원은 해가 쨍쨍한데 그늘은 별로 없어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저는 사원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일본 커플이 자리를 펴고 일몰 구경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서 슬슬 일몰을 보기 좋은 위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햇빛이 강한 탓에 계속 앉아만 있기는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다시 모자를 꺼내 쓰고는 가져간 책을 읽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슬슬 해가 약해지면서 다른 관광객들도 슬금슬금 제 옆자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일찍 와서 자리를 잡은 덕분인지 가장 앞쪽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평선 아래로 산산히 흩어지며 내려앉는 해를 보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마음을 썼던 부질없는 일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도 되었습니다. 장엄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뭔가 슬픈 느낌이 들기도 하는 황혼을 뒤로 하고, 제 가이드를 찾아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 돌아다녀서인지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니 온 몸이 노곤했습니다. 저는 구글맵을 검색해 숙소 주변에 있는 추천 식당에 가서 배부르게 식사를 한 후 다음날 새벽 앙코르와트 일출을 보기 위해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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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평화로운 정적이 흐르는 곳 1

어렸을 적 과학잡지에서 보았던 앙코르와트의 모습은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탐험의 대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주변에서 하나 둘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사람이 생겼고, 크메르루즈의 악명으로 더 유명해진 크메르 제국이 남긴 영광의 상징인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다는 저의 바램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본격적인 학위 논문 작성과 심사을 앞두고 얼마쯤 푹 쉬면서 심신의 휴식이 필요했던 저는 훌쩍 캄보디아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예전에 친한 친구가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을 다녀오는데 태국에서 버스를 타고 8시간인가 걸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시엠립 옆에는 공항이 따로 하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상전벽해라 할만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몸과 마음을 편히 쉴 곳을 찾았는데, 너무 크고 화려한 호텔이 아닌 조용하고 안락한 Butterfly Pea라는 이름의 부티크 호텔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많이 피는 보라빛깔의 꽃 이름인데, 보라색을 좋아하는 제 마음에도 쏙 들었습니다.

시엠립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웰컴 드링크 한잔을 주고, 체크인 후 방으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방에는 몇가지 과일이 든 바구니가 하나 있었는데, 사실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과일들도 있어서 숙소를 떠날 때까지 그대로 둔 과일도 있습니다. 짐을 푼 후 리셉션에서 다음날 투어를 예약한 저는 간단히 식사를 한 후 밤거리를 구경하러 나갔습니다. 제가 머문 숙소는 도시를 관통하는 강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조금만 걸어가면 번화한 중심거리가 나와 쇼핑을 하거나 식사를 하기에도 좋았습니다. 다만, 호텔을 나갈 때마다 길가 한쪽에 서있는 직업 여성들이 자꾸 “오빠 멋있어요~”라고 하면서 다가오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는 했습니다. ㅎㅎ

첫날 푹 잠을 잔 저는 다음날 일찍 앙코르와트 투어를 하기 위해 가이드와 함께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보통 앙코르와트 투어는 그랜드 투어, 스몰 투어로 나뉘는데 저는 그랜드 투어를 선택해서 많은 곳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앙코르톰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있는 데바과 아수라들이 나가를 당기면서 ‘우유의 바다’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 모습에서 진지한 사원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바이욘 사원 등 건물에는 사방에 제가 좋아하는 조각들이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어 그 조각들을 감상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그래서 자꾸 가이드가 다른 곳에 가자면서 끌고 가는 것이 좀 아쉽게도 느껴졌습니다. 가이드 투어를 하는 경우 더 시간을 두고 감상하지 못해서 아쉽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더 좋은 곳들이 있으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앙코르톰을 지나 관세음보살상이나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도 알려진 평화로운 얼굴 조각이 있는 바이욘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바이욘 사원과 다른 장소에서 가이드가 자신만의 기술로 찍어준 사진을 보면 가이드 투어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바이욘 사원은 아름다운 조각상들로 유명한데 특히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 드러나는 음영의 대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사원 앞에 있는 와불은 노란 장삼 한장만을 걸쳤는데 무언가 쓸쓸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이욘 사원의 문을 보면 마찬가지로 석재를 사용해 끼워맞춘 잉카문명의 문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사원 내부는 바깥보다 좀 조용한 편이었고 다산을 상징하는 남근석과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는 듯한 불상이 있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고요하면서도 알 수 없는 울림이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제 안내를 맡았던 가이드는 일종의 트릭 사진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는지, 아이폰의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 신기한 사진들을 더 많이 남겨주었습니다.

바이욘 사원 벽에는 아름답게 부조된 조각들이 많아서 계속 넋을 잃고 조각상들을 보다가 가이드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바이욘 사원을 둘러본 후에는 큰 불상이 보관되어 있는 전각을 지나 무지개 다리를 통해 바푸온 사원으로 갔습니다. 원래는 시바신을 모시는 사원이었는데, 이후 불교 사원으로 바뀌면서 탑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바푸온 사원에서는 특히 통로 위 천장을 아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햇빛이 스며드는 벽 기둥 사이로 보이는 완벽한 아치가 특히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유럽 고딕양식처럼 대칭의 둥근 아치와 빛을 이용한 아름다움이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가이드로부터 사원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보니, 처음에는 사원의 가장 꼭대기에 시바신을 상징하는 남근상을 세워두었었다고 하는데 힌두교의 시바신은 브라흐마신처럼 창조의 신이 아닌 파괴의 신인데 시바신의 상징이 다산과 창조를 의미하는 남근상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소멸이 있어야 새로운 생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인지…

바푸온 사원의 정상까지 올라가 주변을 내려다보니 정글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주변에 나무들이 무성했습니다. 다시 넓은 길가로 나와서 보니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왕 테라스가 보였는데, 테라스들에도 섬세한 부조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문둥왕이란 이름은 테라스 위에 있는 좌상이 이끼 때문에 얼룩덜룩하게 보여 나병으로 죽은 야소바르만 1세를 연상해서 지어진 것이라는데, 알고 보니 좌상에 새겨진 15세기의 글을 보면 좌상은 죽음의 신인 야마(Yama)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문둥왕 테라스로 널리 알려져서 그 후로도 계속 문둥왕 테라스라고 불린다니 역시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가 힘들긴 한가 봅니다.

크메르 제국의 왕들이 연회와 행진을 즐겼다는 테라스를 지나다 보니 어떻게 사원 건축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벽의 구조가 노출된 것이 보였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많은 라테라이트라는 흙이 햇볕을 받고 건조해지면 붉은 색의 매우 단단한 재질이 되는데, 이 흙으로 벽돌을 만든 후 그 위에 화려하게 장식으로 조각된 부드러운 사암을 붙이는 식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원에서는 사암과 테라코타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는데, 테라스를 보고 있자니 밝은 빛 속에서 마치 화이트 초코 케이크 한 쪽이 흘러내려 안의 빵이 보이는 것 같은 장면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널찍한 길을 따라 가루다상이 있는 앙코르 톰의 문을 지나서 다시 프레아 칸이라는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프레아 칸은 원래 불교 사원이었지만, 일부는 힌두교에서 유지의 신으로 불리는 비슈누에게, 또 다른 부분은 파괴의 신인 시바에게 바쳐진 특이한 곳입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각에서 산신이나 북두칠성, 용왕을 기리고 있는 것과 비슷해보였는데, 불교의 포용력이 보편적으로 컸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레아 칸은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는지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사원 천장 가까이에 난 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빛을 받아 탑인 스투파가 빛나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 줬습니다. 다른 사원과 다른 건물들도 눈에 띄었는데, 장경각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레아 칸 사원에는 건물에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곧게 서있는 나무가 인상적인데, 제가 찍은 사진들만 봐도 이제는 관광객들에게 사원보다 나무가 더 눈길을 끄는 것도 같습니다.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배도 고프고, 점점 더워지는 것도 같은 차에, 마침 가이드가 점심식사를 하고 가자고 해서 오전 투어는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배를 채운 후 다시 오후 투어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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