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국선변호사건 일부 무죄 파기환송 판결

여행을 하다보면 목적지를 찾아 처음 가는 길을 걷고는 합니다. 그러다 간혹 이쪽 모퉁이에서 만나 같은 골목길을 걷다가 갈래길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던 다른 여행객을 한참 떨어진 목적지에서 마주치기도 합니다. 가는 방향이 달라도 마지막에 도착하는 목적지는 같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맡은 소송에서도 그런 일이 생기고는 합니다.

지난 주에는 대법원에서 상고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국선변호인으로 맡았던 사건이었는데, 소송기록을 보며 상고이유서를 작성할 때부터 기존 1심, 2심 판결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러 범행 중 실제로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기죄 인정 여부에서 임대차계약이 종료한 후 임차인의 점유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저는 피고인이 잘못을 한 것은 맞지만 이런 문제는 민사적으로 해결해야지,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임대차계약이 종료한 후라도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받을 권리와 임차건물 반환이 동시이행 관계에 있으니 임차권도 여전히 인정될 듯 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보증금이 없는 임대차계약도 있을 수 있고, 보증금이 소액이고 월세가 고액이면 보증금의 이자 상당액과 차임이 등가관계가 아닐 수도 있어 차임 상당의 부당이득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결국 이렇게 임차건물을 반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물권인 점유권의 존재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동시이행항변권이라는 채권에 근거해 반환 거부가 위법하지 않기 때문인지 고민이 됐습니다.

원래 상고심 형사사건은 징역 10년 이상의 중대한 형이 선고된 경우에만 대법원에서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사실관계나 법리적인 쟁점이 있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판단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도 양형으로는 대법원에서 다룰 사건이 아니었지만 법리적인 쟁점이 있는 사건이라 국선변호인으로서 상고이유서 작성에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예전에 했던 다른 사건에서도 법리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대법원에서 그냥 기각이 되어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법원에서 사기죄와 관련해 기존 1심과 2심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 파기하고, 다시 재판을 하라고 원심법원으로 돌려보내는 일부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에 얼른 판결문을 발급받아 내용을 살펴보니 사기죄의 보호법익에서 재물의 사용수익은 제외하기 때문에 점유권에 대해서는 사기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기존의 2012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한 판단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생각했던 논리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점유권의 성격에 대한 제 고민이 결과적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대법관의 관심을 끌었나 봅니다. 결국 제 의뢰인은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판결로 일부 범행이 무죄로 인정되어 형량이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목적지로 가는 길은 처음 계획과 다소 달랐지만, 제가 처음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제 의뢰인에게는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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