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제가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연수원 동기 형이 자녀 양육권 관련해 법적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간단하게 서면을 작성해줄 수 있냐고 해서 몇번 상담을 하고 양육과 관련된 내용을 변경하는 재판과 관련해 간단한 서면 작성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1년이 좀 안 되었나 싶은데,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국민들 대다수가 그랬겠지만, 저도 왜 구조를 못한 것인지 참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정적으로는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호가 침몰하고, 열흘 정도 흐른 어느 날, 전에 제게 양육과 관련해 서면 작성을 해줄 수 있냐고 소개해줬던 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형은 제가 전에 양육권 관련해 서면을 써줬던 딸이 세월호에 탔다가 실종됐다는 말을 했고, 저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많은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맡았던 사건으로 인해 그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온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구성 관련 이메일을 뒤져보았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배의철 변호사님과 황필규 변호사님이 법률지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직접 황필규 변호사님에게 연락해 법률지원단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저는 안산으로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고, 진도에 내려가 배의철 변호사님과 만나 현지 상황을 듣고 실종가 가족들이 머물던 팽목항과 체육관을 보고 올라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되면서 광주, 목포와 해남에서 재판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머물면서 경찰병력, 일베들과 기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에서 CCTV를 건져올린 후에는 오창에 있는 M사에서 CCTV 복원을 위해 주말마다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기회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는 그렇게 6개월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로 진상조사단으로, 때때로 현장대응이나 법률지원단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제가 소속됐던 대한변호사협회 차원의 법률지원단은 활동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 정부의 진상조사 활동도 다양한 세력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후의 추가적인 조사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무게를 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의 실체가 완전히 밝혀져야 하고, 그 교훈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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