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법원 국선 사건으로 맡았던 준유사강간 사건이 있었는데 기록을 열람, 복사하기도 전에 피고인의 모친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복사한 사건 기록을 보다보니 20대의 대학생이 오랜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신 후 술에 만취한 지인을 상대로 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모범적이고 바른 삶을 살아왔던 학생이어서 의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제가 사건을 맡았던 시점은 대법원 상고심 단계라 이미 사실확정이나 법리 적용이 끝난 상태였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한 상고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고인의 모친에게 그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면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될테니 피고인에게 미리 그러한 내용을 설명해두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 충격을 덜 받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안내했습니다. 만일 제가 피고인의 사건을 제1심이나 최소한 항소심에서부터 맡았더라면 법리적으로는 좀 다퉈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라 더 이상 손을 써볼 길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범죄 형사 사건의 경우 그 특성이 있어 사건을 진행하는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제가 했었던 사건들 중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기습추행’이라고 불리는 유형의 사건이었는데, 사실관계를 잘 살펴보면 실제로는 강제추행이 아니라 단순 폭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사건으로, 제1심에서 유죄로 많은 액수의 벌금을 받아서 제가 항소심부터 수행했던 사건입니다. 사건을 수임하고 이러한 유형의 사건에 대한 논문들이나 외국법상 법리들을 정리한 후 사건 당시 피해자 이외 현장에 있었던 주변인들의 진술서와 증언을 근거로 강제추행 여부에 치열하게 다투면서 무죄를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아쉽게도 무죄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선고유예라는 좀 예외적인 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선고유예는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 제가 맡았던 사건에서 선고유예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 약간은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재판부도 피고인이 진짜 강제추행을 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1심 법원과 반대로 사실인정을 한 후 무죄를 선고할 만한 용기까지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피고인은 선고유예형을 받아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범죄경력이 소멸하게 되었고, 피고인이 이후 해외 입국비자를 발급받을 때 강제추행 등 성범죄 전력이 있으면 비자 발급이 거절되지만, 선고유예형이라는 이유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건은 오랜시간 시험 준비를 하던 젊은 청년이 길 가던 피해자들을 따라간 후 주거에 침입하여 강제추행을 하였던 내용이었습니다. 피고인은 처음에는 자신의 범죄 행위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투정을 부리고, 불만을 터트리다가 나중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실형만은 면했으면 하고 빌곤 했습니다. 저는 사건 수임 당시 뿐만 아니라 사건을 진행하면서 성폭력특별법 적용을 받는 중대한 사건이라 여러 피해자들 중 일부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합의를 하면서도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피고인의 범행 당시 정황이 아주 질이 나쁜 것은 아니었던 탓인지, 몇 개월 동안 구치소에서 미결구금을 당하긴 했지만, 제1심 판결은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형이었습니다. 저는 판결 선고 당시 법정에 출석했었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후 얼굴이 밝아진 피고인을 보고 있자니 기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에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 이제 정신차리고 이러한 범행을 다시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피고인의 경우는 자신이 강제추행한 직후 피해자를 쫓아가 사과를 하는 등 정신적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고, 죄질이 많이 나쁘지는 않은 등 참작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과거에는 너무 양형이 낮아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실제 범행을 한 것인지 사실관계가 의문인 사건들도 피해자의 주장만으로 너무 쉽게 유죄로 인정을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단 성폭력 사건만이 아니라 판결 일반에서도 피해자의 응보 심리 충족과 실체진실 발견이란 양 측면 사이에서 마치 시소처럼 특정 시점에는 하나의 측면이 강조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부작용이 발견되면 다른 측면이 강조되어 장기적으로는 일정한 평형상태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 대중은 신이나 성인이 아니다보니 항상 중용을 지키거나 모든 것을 고려해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피해자 보호 내지는 응보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려는 절차 및 실체법적 보장이 상호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확보한 신뢰성있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수밖에 없고,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피고인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적법하게 긍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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