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위로의 오키나와 여행 2

오키나와에 도착하면 누구나 한번씩 가본다는 곳이 만좌모와 아메리칸 빌리지입니다. 만좌모는 해식 절벽에 면해 있는 넓은 들판인데, 절벽을 옆에서 잘 보면 코끼리 얼굴 모양이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사실 처음 만좌모에 갔을 때는 이게 왜 유명한 관광지인가 싶을 정도로 별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는데, 주기적으로 파도가 와서 부딪치는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투명하고 예쁜 바닷물색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누나와 같이 사진도 한 장 찍었습니다.

만좌모를 둘러본 후 다음으로 아메리칸 빌리지를 찾았습니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한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일본에 주둔하게 된 미군 중 상당수가 오키나와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의 진군을 막아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여기에다 일본 본토와 떨어진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상당수를 배치하기까지 했으니 일본 본토 국민들의 불만은 줄였을지 모르지만, 원래 일본과 다른 국가였던 류쿠 왕국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인들은 이러한 차별대우에 더욱 분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찾은 아메리칸 빌리지는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만좌모를 둘러보고 오느라 다소 배가 고팠던 누나와 저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맛집인 철판 스테이크집을 찾아갔습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많아 대기줄이 길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찾아갔을 때에는 별로 손님이 많지 않아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요리사가 채소와 고기를 철판 위에 놓고 기름을 부으면서 불쇼를 보여줬는데, 불 속에서도 넙적한 칼로 고기와 채소를 뒤집고 자르면서 먹음직스런 요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배가 고픈 우리는 구워진 요리를 얼른 먹었는데, 뜨거운 불로 빨리 익혀서 그런지 겉은 바싹 익었는데, 고기 속은 육즙이 충분히 남아 있어 맛이 꽤 괜찮았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누나와 아메리칸 빌리지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는데, 아기자기한 예쁜 공예품을 파는 곳도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사케와 뱀술 등 제가 좋아하는 주류들을 잔뜩 갖추고 일본 전통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상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칸 빌리지를 한번 둘러본 후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가게에 들러 콘 아이스크림을 각자 하나씩 사먹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누나와 함께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걸어다녔던 것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오랜만이라 누나와 자랐던 어릴 적 추억이 많이 떠올라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후를 보낸 아메리칸 빌리지를 떠나 슬슬 해가 질 듯 해서 일몰을 보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제가 머물던 숙소는 호텔체인에 속해 있어 오키나와에 같은 다른 숙소의 편의시설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몰 명소로 유명한 해변가를 끼고 있는 다른 숙소로 이동을 했는데, 그 해변은 호텔 이용객만 이용할 수 있어서 한적하게 해가 지는 멋진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해가 져서 어스름해지자 저와 누나는 오늘은 숙소 밖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숙소 앞에 있는 마을에 손님이 붐비는 식당이 있어서 그 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고 숙소에 주차를 한 후 걸어나왔습니다. 누나와 함께 한적한 도로 옆 인도를 걸어나오면서 옛날에 제가 잘못했던 것들에 대해 사과도 하고, 어렸을 때 함께 봤던 만화영화 주제가와 어릴 적 유행했던 가요들을 함께 불렀는데, 누나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어서 후련하기도 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식당에 도착했는데 그 곳은 음식도 괜찮았지만, 알고보니 앞에 설치된 무대에서 오키나와의 전통 노래와 춤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벽에 전시된 악기들과 사진들을 보니 식당 사장님 가족들은 전통 공연으로 우리 식의 무형 문화재 지정 같은 것은 받은 것 같았습니다. 맛있는 오키나와 전통 음식과 술에 뜻밖에 전통 공연까지 본 후 누나와 저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숙소로 돌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여행 마지막날이었던 다음날에는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한 후 오키나와에 있는 여러 성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키나와 중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츠렌 성부터 찾아갔는데, 우리가 생각한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돌을 정교하게 쌓아서 유려한 곡선의 성벽을 만들어낸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 눈에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는데 막상 걸어올라가다보니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땀이 나기도 했습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식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성벽 한쪽 구석에 핀 붉은 꽃도 다소 차가운 회색벽과 대조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성 가장 위로 올라가보니 주변 경치가 쫙 펼처져 있는 것이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가츠렌 성 다음에는 과거 류쿠 왕국의 도성이었던 슈리성을 찾았습니다. 슈리성은 처마가 치솟고, 벽과 기둥, 기와가 모두 핏빛처럼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자기하고 예쁜 실내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일본식 정원이 곳곳에 있었는데, 차경이나 자연스러운 맛이 강한 우리 조경과 다르게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절제된 매력이 있어서 그것 역시 또다른 아름다움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슈리성을 다 둘러본 후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누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은 후 나하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누나와 공항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샀는데, 누나가 갑자기 제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산 것이 참 오랜만이라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찔끔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누나가 그동안 조카를 키우면서 매형과 참 알뜰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과 누나와 이번 여행을 온 것을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 후 인천공항에서 헤어지는데, 누나의 그렇게 밝은 얼굴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참 좋아졌습니다. 계속 손을 흔들고 있는 누나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저는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또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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