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아비뇽의 구도심을 떠나 우리는 산 위의 아름다운 마을인 고흐드로 향했습니다. 아내가 들르고 싶어한 곳이기도 하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기도 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비뇽에서 고흐드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금방 도착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언덕길에서 반대쪽을 보니 아름다운 절벽과 그 위에 있는 집들이 보여 차를 세우기 싶었는데, 주차장을 찾느라 한참 헤맸습니다.
몇 곳을 지나친 후 다행히 빈 주차장을 찾아 차를 댔습니다. 마을의 전망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둘러본 후 아내가 예약한 L’Artegal에서 간단하게 가지볶음, 고기 필라프와 샐러드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한 후 주변을 산책하는데,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광고판이 보였습니다. 프로방스가 라벤더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처음 봐서 한번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한 입 떠먹는 순간, 라벤더의 강렬한 보라빛 향기와 실크처럼 부드럽게 녹는 식감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감탄사를 쏟아내는 저를 지켜보던 아내도 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숟가락을 받아 떠먹더니 엄청난 맛이라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라벤더 아이스크림의 향을 맡으며 다시 골목길을 걷던 우리는 전망이 좋은 절벽 한쪽에서 고흐드에서의 멋진 순간를 기록했습니다.


고흐드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오늘의 숙소가 기다리고 있는 무스띠에 셍-마리로 차를 몰았습니다. 고흐드에서 무스띠에 셍-마리까지는 시골길을 따라 2시간 이상 걸렸는데,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주변 풍광이 멋있어져서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 또한 커져갔습니다. 2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좀 피곤했던 저는 숙소에 도착하기 전 잠시 차를 세우고 아내와 휴식을 취하면서 해가 지기 전에 무스띠에 셍-마리 마을 주변을 멀리서 카메라로 잡아봤습니다.

이윽고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마침내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좁은 숲길을 따라 갔더니 나타난 숙소는 약간 시골 산장 같은 곳으로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차를 세운 후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는데, 숙소의 사장님 같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2층에 있는 우리 방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 주셨습니다. 2층 방에 들어가보니 영화에서 보던 옛날 저택처럼 방이 있고 그 옆에는 매우 넓은 화장실과 파우더룸이 있는 독특한 구조였습니다.
시골길을 따라 운전하느라 좀 지친 저는 짐을 풀고 잠시 쉬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비뇽에 있는 호텔에서 서둘러 나오느라 호텔 방 금고 속에 넣어 놨던 신용카드와 현금 800유로를 놓고 나온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여행에 사용할 경비였던 현금과 신용카드였기 때문에 큰 일이라는 걱정과 함께 다시 가서 받아와야 하나,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비뇽 호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비뇽 호텔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다 마침내 여성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호텔에 머물 때 인사를 나눴던 호텔 사장의 부인이었는데 제 얘기를 듣더니 금고의 비밀번호와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설정한 비밀번호와 금고 속에 있는 현금 등에 대해 설명을 했고, 잠시 후 확인을 해보겠다고 하더니 물건들을 찾았다며 어떻게 보내줄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이메일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저는 우리가 프랑스에 마지막으로 묵게 될 마르세유의 호텔을 알려주고, 그 곳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걱정말라면서 내일 아침에 우체국 택배로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메일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한 후 아내와 생 마리 마을로 저녁 식사를 하러 차를 타고 나갔습니다.
10분 정도 운전을 한 후 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이미 시간이 좀 늦어서인지 아니면 코로나인데다 관광 비수기라서 그런지 생 마리 마을은 거의 대부분의 식당과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매우 조용한 마을 곳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전에 쇼핑을 했던 음식들로 저녁을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그날 밤은 운전을 길게 한 데다가, 아비뇽에 현금을 놓고 온 문제를 해결하느라 긴장했는데 잘 해결이 되어서 그런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바깥 기온이 상당히 쌀쌀했습니다.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서 숙소 주변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숙소 사장님이 1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다가 아내와 얘기해보니 마을 위쪽에 있는 예배당이 경치도 좋고, 분위기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차를 몰고 그 곳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계단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조각상들이 길 옆에 서 있고, 뒤를 돌아보니 셍-마리 마을도 보였습니다. 고개를 더 높이 들어 보니, 절벽 사이로 무스띠에 셍-마리 마을의 명물인 별도 보였습니다. 이 마을이 유명해진 이유는 십자군 원정을 갔던 기사가 자신이 고향에 살아 돌아가면 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별을 걸겠다고 기도를 했고, 무사히 돌아온 기사가 자신의 약속을 지켜 절벽 사이에 별을 매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예배당 올라가는 길이 좋았지만 특히나 예배당 바로 앞의 계단이 운치가 있고 아름다웠습니다.






저와 아내가 가뿐 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라가 예배당을 들어섰는데, 마침 예배당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부부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느낌이 들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무로 된 예배당 문에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처음 들어선 예배당 안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매우 어두웠습니다. 잠시 적응하고 나니 십자가와 예수님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약한 빛줄기를 통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희만 있는 고요한 예배당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한참 멍하니 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이제 내려가자는 말을 해서 슬슬 예배당을 나왔습니다.






예배당을 내려와서 마을에 가보니 엄청 큰 다리와 폭포가 있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마을을 만들다보니 그렇게 토목공사를 크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올려다보니 절벽에 걸린 별이 마찬가지로 잘 보였습니다. 아침부터 등산을 해서인지 저나 아내나 둘다 배가 고파서 일찍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나섰는데, 마침 평이 좋은 식당이 문을 연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쌀쌀한데 돌아다녀서 그런지 빵과 따뜻한 음료를 마시니 몸이 좀 녹았습니다.




마을에서 식사를 한 후 숙소로 짐을 챙기러 돌아왔습니다. 숙소 사장님에게 인사를 한 후 차를 몰아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생트 크화 호수의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보트를 탈지, 카약을 탈지 고민하면서 수영복을 미리 입어야 할지도 걱정을 했는데, 막상 선착장에 도착해보니… 띠로리~~ 이상하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트나 카약도 호수에 떠있지를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초봄이라 비수기인데다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운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쉬워하는 아내를 달래서 호수 주변 마트에서 들러 오렌지 주스와 천도복숭아 등 간식을 산 후 멋진 풍광으로 유명한 베흐동 협곡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달려 베흐동 협곡으로 들어서는데, 나무들 사이로 멀리 터키석같이 아름다게 빛나는 생트 크화 호수가 보였습니다. 아내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려고 차를 세운 후 잠시 내려 호수를 구경한 후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베흐동 협곡의 수백미터 절벽을 따라 난 왕복 2차로를 달리는데, 좁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인데도 제한속도가 시속 80km나 됐습니다. 프랑스에서 운전을 하면서 많이 느낀 것인데,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사람들보다도 운전을 훨씬 거칠게 해서 깜짝 놀랐고, 베흐동 협곡같은 좁은 길에서도 제가 모는 차 후미에 차를 들이대고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해대는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저는 초행 길인데다 차도 익숙하지 않은데, 계속 이렇게 위협을 하니 자꾸 위축이 되고 마음이 많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전망이 좋은 전망대가 있는 곳에서 잠시 내려 바람을 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함께 전망대로 걸어갔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에!! 위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높은 암봉들이 서 있고, 아찔한 낭떠러지 아래로는 푸른 계곡물이 흘러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구경하는 여행객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까봐 철제 난간까지 설치해둔 것을 보니, 이 곳이 인기있는 전망대는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마음의 안정을 찾은 저는 다시 차를 몰고 협곡의 아래에 있는 길까지 달려내려갔습니다. 제가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저도 그렇지만 아내가 멋진 절벽과 바위가 있는 풍경을 좋아해서였는데, 막상 2시간 가까이 좁은 산악길을 달리다보니 아내가 멀미를 해서 바깥 경치를 볼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괜히 넓은 길을 두고 이 길로 왔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미 들어선 길, 되돌아 갈 수도 없어 계속 아래로, 위로 달리다보니 마침내 샌드위치 같은 고원지대가 호쾌하게 펼쳐진 지형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이런 산길도 끝났다는 안도감에 아내와 함께 차에서 내려 고산지대의 상쾌한 바람을 맞은 후 기념 사진도 찍었습니다. 마구 불어대는 바람에 저와 아내의 머릿카락이 흩날리는데, 얼굴은 환하게 웃는 장면이 마치 큰 고난이라도 끝나 마음이 편해진 듯 합니다.





마치 큰 과제를 끝마친 것처럼 산길을 천천히 내려와서 들판을 따라 달리다 보니 길 양 옆으로 키가 작은 관목 같은 식물들이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식물들이 뭔지 알지 못했는데, 계속 식물들이 심어져 있어 마침내 그것이 라벤더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이 길은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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