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싸운다는 것

오늘은 한달에 한 번 서울시 마을변호사로 상담을 하는 날이었는데, 주민센터에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이 저에게 자신이 기억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전에 오셨냐고 답하면서 언제 오셨냐고 물었더니 1년 전에 왔었다면서 자신이 아니라 오빠의 사건 때문에 왔었는데, 1년 동안 재판을 받고 다시 상담을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담자가 하는 얘기를 듣다보니 전에 들었던 사연이 생각났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공무집행방해 사건이었습니다. 술을 마신 오빠가 인도에서 길을 막고 다른 사람을 체포하고 있었던 경찰관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전에 상담하면서 무죄를 다투고 싶다고 하기에 목격자 진술을 확보해 대응하라고 했는데, 실제 공판에서는 재판장이 주변에서 상황을 본 가게 주인의 진술은 배척하고, 동료 경찰관의 진술을 믿어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찰관이 상황을 오해하고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의뢰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상해를 입힌 것과 관련해 국가배상청구 사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많이 느낀 바 있습니다.

일단, 법원은 경찰이나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판사 스스로가 보통 법을 잘 지킬 뿐 아니라, 같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동료의식이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아가 설령 그런 잘못을 했더라도 국가재정을 생각하면 배상까지 인정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도 보입니다. 다른 변호사들과 얘기하다보면 종종 판사가 법 해석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넘어 국가재정을 지키는 수비선수 역할을 자임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관계 확정에 있어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이 인간인 판사로서도 쉽지 않겠지만,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고도 하는 판사들은 이러한 세간의 의심마저도 잘못된 것이었다는 깨닫게 해주는 판결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는 각 동별로 마을변호사가 있어서 법적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사안이나, 경제적으로 법률 상담료를 지급하기 어려운 분들은 한번 이용해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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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정치적 박해로 인한 인도적 체류 허가

제가 국내에 체류하는 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구성했던 난민구금 TF에 참여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처음 수행했던 사건은 2013년말부터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종교적,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신청을 하였는데, 증거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은 난민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난민신청자는 난민신청이 거부되어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었고, 화성외국인 보호소에 보호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은 이전부터 난민소송 조력을 해오셨던 공감의 박영아 변호사님과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와 함께 진행했는데, 국적국의 주류 민족이 소수민족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데다가 서로 종교도 달라 제 의뢰인이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제 의뢰인에게 종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고, 사원을 파괴하는 등 박해의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이에 제 의뢰인은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였다가 정부의 눈을 피해 우리나라로 피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의뢰인의 난민지위인정 신청이 거부되었고, 행정소송 1심과 항소심에서도 증거가 부족하고, 여권에 기재된 성명의 동일성 여부가 문제된다는 이유로 패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 의뢰인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3년 가까이 보호(사실상 구금)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겪는 시련도 신이 내린 것이라면서 50이 가까운 연세인데도 인내심을 갖고 잘 견뎌내었습니다. 또한, 제가 면회를 가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힘들텐데도 항상 웃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해서 종교인이라 뭐가 다르기는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후 저와 박영아 변호사님은 의뢰인과 의논해 난민신청을 다시 하기로 하였고, 다행히 이의신청 단계에서 법무부 난민위원회가 난민지위는 인정되지 않지만 국적국으로 귀국시 박해의 위험은 있다며 인도적 체류허가는 허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제 의뢰인은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후 외국인보호소에서 보호해제되어 제 법인 사무실 앞까지 오셨는데, 가장 먼저 한 얘기는 너무 고맙고 제게 신의 은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외국인보호소 밖에서 보니 더 반갑다고 축하인사를 건넸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유엔난민기구(UNHCR)과 난민지원단체에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제 의뢰인은 이후 난민지원단체에 잠시 머물다가 종교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있는 종교시설로 옮겨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동안 제 의뢰인의 국적국 국가정황이 호전되어 제 의뢰인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되어 제 의뢰인은 앞으로도 국적국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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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의상능선 산행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등산 동호회 산행에 참여했습니다.

북한산은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산인데, 어렸을 때나 대학원에 다닐 때 몇번 올랐던 산입니다. 대학원에서 강의를 들을 때는 한 교수님이 해당 과목의 전통이라고 하시면서 토요일 오전에 정독도서관에서 세미나를 하고, 오후에는 북한산 등산을 하셔서 몇번 따라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북한산 등산로

등산 동호회분들은 역시 베테랑들이시라 그런지 평이한 등산로가 아닌 처음 듣는 의상능선이란 등산로를 타고 오르게 되었는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안내판에 있는 등산로 난이도를 보고 예상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른 길은 저 노란 길도, 녹색 길도, 붉은 길도 아닌 시작하자마자 새까만 그 길이었습니다. 처음 1/3은 매우 어려운 검은색, 그 뒤는 1/3은 어려운 자주색, 다시 1/3은 매우 어려운 검은색…

오랜만에 시작하자마자 급경사를 밧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하니 운동을 하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는데, 몇 시간을 그렇게 걷다보니 나중에는 다리에 힘이 좀 빠졌습니다. 더구나 절벽에 있는 밧줄을 잡고 계속 오르다보니 다리힘보다는 팔힘으로 오르면서 균형이 잘 안 잡혀 순간적으로 휘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구간을 지나 주변 경치를 살펴보니 왜 의상능선이 북한산 최고 절경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3개의 봉우리는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이고, 바위 사진은 토끼 바위라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토끼가 돼지랑 뽀뽀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등산하기에 날씨도 딱 좋고, 하루 전에 내린 비로 계곡에 물도 있어서 하산하는 길에는 즐거운 물소리를 들으면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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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권판결에 대한 불복의 소 사건

제가 변호사가 되면서 다양한 사건을 해보고 싶었고, 실제로 다양한 사건들을 다뤄봤지만, 솔직히 제권판결에 대한 불복 사건을 하게 되리라고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건 의뢰를 받기 전에는 제권판결과 관련된 내용이나 법적 절차도 상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유가증권이 도난, 분실 등 사유가 있는 경우 법원의 판결로 그 증권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인데, 제 의뢰인이 이전에 인수한 유가증권에 대해 발행인이 이전에 제권판결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발행인이 제 의뢰인의 채무자가 소지하게 된 해당 유가증권을 잃어버렸다면서 제권판결을 받았는데, 위 채무자는 제 의뢰인에게 돈을 차용하면서 위 유가증권을 담보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가증권을 중간에 소지했다가 제 의뢰인의 채무자에게 배서해 양도한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그 사람의 행방이 묘연한데다 금융기관에서 개인정보라는 것을 이유로 인적사항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유가증권에 배서되어 있는 주소나 전화번호로도 배서인을 찾기가 힘들어 고민을 하다가 제가 전에 사법연수원 시보 시절 실무수습을 했던 금융감독원의 절차를 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금융감독원에는 일반 국민들이 은행 등 금융기관과 관련한 법적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민원 등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수습 당시 같이 근무했던 금융감독원 소속 직원에게 관련 내용을 문의했더니 가능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민원 서류를 작성해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법원에서 절차를 진행했더니 은행에서 급하게 관련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일단 해당 정보를 받고 난 후 의뢰인과 의논하여 유가증권을 무단으로 양도했던 사람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법적인 문제가 있으니 해결을 위해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제 사무실로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한 사람은 유가증권을 양도했던 사람의 남편이었는데 자신의 아내가 과거 유가증권을 주워 양도했던 것이 맞다고 하면서 아내가 매우 두려워한다면서 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했던 가족이 있던 아내가 유가증권을 우연히 주웠는데, 잘못인 줄 알면서도 유가증권을 돈을 받고 넘겨 수술비를 마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내는 언젠가는 그 유가증권과 관련해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10년 넘게 불안해했다는 것인데 자신에게도 내용증명을 받고서야 울면서 얘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듣고 의뢰인과 상의해서 우리의 목적은 채무자로부터 받은 유가증권의 원리금을 받는 것이 목적이지 그 유가증권을 마음대로 처분한 사람을 형사처벌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리금에 해당하는 금원을 준다면 더이상 과거의 일은 문제삼지 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이에 남편이 해당 금원을 마련해와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결국 의뢰인 입장에서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재판도 종결시키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건을 시작할 때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금융감독원의 민원 절차를 거쳐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가족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의 유가증권을 함부로 양도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로 인해 10년 넘는 시간을 불안에 떨며 살았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고, 내용증명을 받자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적인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래도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상황 때문에 한 순간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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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2

지난 글에 이어 군 제대 후 유럽배낭여행 당시 일화입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북유럽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 한인민박집에 머물던 어느날 저녁 6개월째 배낭여행 중이라는 형을 한 명 만났는데 다음날 백야를 보러 북극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체코 가는 기차에서 만난 할머니가 추천해준 체스키 크롬로프를 갔다가 독일에 오래 머물 생각이었는데, 백야와 북극이란 단어가 저를 너무도 강렬하게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다가 일정을 전부 변경해 그 형과 북극에 가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노르웨이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일단 체코에서 우리가 가려는 노르웨이 나르빅역까지는 기차로만 2박 3일을 가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북유럽의 물가가 어마무시하다는 얘기를 전부터 듣고 있었던 우리는 일단 일용할 양식을 사서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커다란 식빵 2봉지, 2리터짜리 생수 2통, 살라미 1개, 딸기잼 작은 병, 맛있는 체코 맥주 5병(아무리 돈이 없어도 맛있는 체코 맥주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음)을 사서 기차에 탔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여행한 얘기도 하고, 빵에 잼을 바른 후 살라미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꼬박 기차를 타고 스웨덴 국경을 통과해 올라갈 때가 되니, 점점 지루해지고 식빵만 먹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더구나 스웨덴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아 크로네만 사용할 수 있어 스웨덴에서는 물건도 전혀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스톡홀름에서 사철(사기업이 운영하는 기차)을 타고 나르빅에 가는데, 문제는 유레일 패스로 기차를 탈 수는 있는데 좌석 예약은 불가능해서, 좌석이 없는 경우 서서(!!)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야 어찌어찌 타고 가더라도 문제는 밤에 잠을 잘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동행한 형과 저 모두 한창 젊은 나이라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객실에는 자리가 없으니 승하차하는 계단이 있는 복도에 침낭을 깔고 자기로 했습니다. 당시 기차에 타고 내리는 다른 승객들이 좁은 공간에서 한국인 2명이 침낭에 들어가서 계단을 피해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지 지금도 궁금하긴 합니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기차만 타고 도착한 노르웨이 나르빅은 유럽 최북단 기차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로포텐 제도까지는 다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기차에서 내렸는데, 저 앞에서 왠지 한국인 같은 여성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배낭을 메고, 하나같이 머리에 천으로 된 정글모자를 썼는데, 당시 유럽에서 그런 모자를 쓴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까지 오는 다른 한국인들도 있구나”하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하고 보니, 그 분들은 학교 선생님들이었는데 그분들도 마찬가지로 로포텐 제도에 가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의기투합한 우리 일행은 함께 마트에서 연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연어가 엄청나게 비쌌는데, 거기선 연어 1마리를 살만 발라 포장한 상품이 1만원 정도 였음)를 비롯한 식료품을 사서 유람선을 탔습니다. 북해의 찬 바람을 가르고 로포텐 제도에 도착한 후 백야를 보면서 연어로 스테이크도 굽고, 샐러드 해 먹고, 연어 라면도 끓여먹은 후 캐러밴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북해의 바람을 가르며 로포텐 제도로 가는 유람선에

백야에는 새벽 3시 정도까지 온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데, 그 시간이 지나 5시 정도면 어두워지기보다는 하늘이 다시 밝아지면서 새벽이 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백야라도 잠을 자야하니 아주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잔다는데 우리는 백야를 감상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다음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계속 졸아야 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는 원주민들이 벼룩시장을 열기도 하는데, 거기 걸려 있는 하얀 북극여우 가죽을 16만원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원주민들에게만 사냥을 허용한다는데 어머니 선물로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제 입장에선 비싸기도 하고, 올무로 잡느라 여우 발 하나가 없어서 마음이 좀 그렇기도 해서 결국 사지는 못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 나와서는 게이랑게르 피요르드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유람선을 쫓아오는 갈매기들에게 빵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영종도 가는 유람선에서 던져준 새우깡을 잘 받아먹는 우리나라 갈매기들처럼 노르웨이 갈매기들도 빵을 뭉쳐 던져주면 잘 받아먹는 것을 보고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브릭스달에서는 빙하기에 다 녹지 않은 빙하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캔디바 같은 색이어서 신기했는데, 가까이 하니 원래 하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등산하다가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는 것처럼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다른 여행객이 그 물에 수만년 전 빙하에 들어갔던 박테리아가 있을지도 모르니 마시지 말라고 해서 얼른 뜬 물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계곡 위로 올라가니 빙하 조각이 떨어져 나와 물에 둥둥 떠있길래 제가 얼른 위에 올라탔는데 빙하가 밑으로 쑥~ 가라앉았다가 다시 위로 떠올라서 주변 여행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여행을 하는 동안 정부가 카페, 유랑선, 마트 등 사방에 설치해 놓은 슬롯머신을 보면서 무료한 삶에 대한 위안거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바로 앞에서 2번이나 큰 금액이 당첨되어 마트 쇼핑 바구니에 동전을 쓸어담는 것을 보고 당첨확률이 높다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했던 형이 당첨 운이 있는 편이라길래 함께 돈을 모아 슬롯머신을 하기도 했는데(우린 당시 슬롯머신을 줄여 ‘땡김이’라고 부르기도 했음), 한번은 슬롯머신으로 약간의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여행경비에 충당하기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1만원짜리 빅맥세트보다 비싼 11,500원짜리빅맥세트를 파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저는 배는 다소 고프더라도 북유럽의 앞선 기술, 여유있는 삶의 태도, 수준 높은 공공인프라 시설에 감탄하고, 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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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1

제가 성년이 된 후 최초로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2002년 여름이었습니다. 군대 말년 휴가를 나와서 비행기표와 여행준비를 다 한 후 제대 3일 후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서 다시 사회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행 경비는 제가 어렸을때부터 모았던 돈으로 준비했는데, 대학생이다보니 돈을 아껴쓰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저렴한 한인민박집에 자주 묵었는데, 혼자 여행을 하던 때라 예약을 잘 하고 다니지 않아서 방이 없는 경우에는 소파에서 절반 정도 숙박료만 주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럽배낭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도시와 국가를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을 잘 하는 것으로 쳐주던 시절이라, 45일 되는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을 이른바 반시계 방향으로 열심히 여행했습니다.

제가 유럽에 도착했을 때가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한 직후여서 유럽 여행 중에도 월드컵 응원을 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갔을 때는 혹시 이탈리아 사람들과 축구 얘기하다가 싸우기라도 할까봐 이탈리아 대표팀 토티가 축구를 잘 한다고 칭찬하고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처음 혼자서 간 해외 배낭여행이라 인상 깊어서 그런지 지금도 여행 당시 있었던 일들이 많이 떠오르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몇 가지만 적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저의 파리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망쳐놨던 파리 뒷골목 불량배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런던에서 TGV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10시 반도 안 됐는데 지하철 운행이 종료됐다면서 다 내리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왜 그 시간에 운행이 종료됐는지 의아하지만, 일단 내리라니 내렸는데 생판 모르는 지하철역으로 나와 보니 숙소와 너무 멀었습니다.

2002년에는 지금처럼 여행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이드북에 의지해 여행을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숙소를 찾아가려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군대 제대 후 보름도 되지 않았던 때라 걷는 것 하나는 자신있어서 지도를 보면서 거리에 적힌 도로명과 맞춰가면서 대략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다 보니 지름길을 찾아간다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사거리에 젊은 애들 여럿이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고, 그 옆 10미터 정도에는 경찰차가 경광등을 켜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당시가 여름인 7월초였는데 드럼통에 장작을 넣어 태우면서 파리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앉아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진짜 송아지만한 개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ㅎ

어쨌든 나는 얼른 숙소로 가고 싶어서 동네 양아치(?) 같은 사람들을 지나쳐 경찰에게 숙소 방향을 묻고, 경찰이 알려준대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오면서 그 사람들을 지나쳐 오는데, 그 중 2명이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쟤들도 저는 집에 가려나 하고 그냥 내 갈길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2명이 저를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모퉁이를 돌면서 슬ㅉ 보니 2명이 어슬렁어슬렁 저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머리 위로 자전거 체인 같은 것을 빙빙 휘두르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좀 웃기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걷는데는 자신이 있었던 저는 만일, 내가 뛰면 그 애들도 뛸 거 같은데, 달리기가 제가 더 빠를지 장담할 수가 없어서 일단 빨리 걷기로 했습니다. 일단 옆으로 메는 가방을 몸에 바짝 붙이고, 최대한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도 따라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이 따라오는 것이 힘들었는지 갑자기 영어로 F*** y**, G** D*** 등 큰 소리로 욕을 막 하면서 저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한 직진만 했더니 결국 3분에서 5분 정도를 따라오다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좀 황당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선 좀 무섭기도 한 일이라 저는 그 다음날 계획했던 파리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바로 파리를 떠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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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제가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연수원 동기 형이 자녀 양육권 관련해 법적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간단하게 서면을 작성해줄 수 있냐고 해서 몇번 상담을 하고 양육과 관련된 내용을 변경하는 재판과 관련해 간단한 서면 작성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1년이 좀 안 되었나 싶은데,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국민들 대다수가 그랬겠지만, 저도 왜 구조를 못한 것인지 참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정적으로는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호가 침몰하고, 열흘 정도 흐른 어느 날, 전에 제게 양육과 관련해 서면 작성을 해줄 수 있냐고 소개해줬던 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형은 제가 전에 양육권 관련해 서면을 써줬던 딸이 세월호에 탔다가 실종됐다는 말을 했고, 저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많은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맡았던 사건으로 인해 그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온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구성 관련 이메일을 뒤져보았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배의철 변호사님과 황필규 변호사님이 법률지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직접 황필규 변호사님에게 연락해 법률지원단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저는 안산으로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고, 진도에 내려가 배의철 변호사님과 만나 현지 상황을 듣고 실종가 가족들이 머물던 팽목항과 체육관을 보고 올라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되면서 광주, 목포와 해남에서 재판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머물면서 경찰병력, 일베들과 기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에서 CCTV를 건져올린 후에는 오창에 있는 M사에서 CCTV 복원을 위해 주말마다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기회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는 그렇게 6개월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로 진상조사단으로, 때때로 현장대응이나 법률지원단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제가 소속됐던 대한변호사협회 차원의 법률지원단은 활동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 정부의 진상조사 활동도 다양한 세력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후의 추가적인 조사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무게를 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의 실체가 완전히 밝혀져야 하고, 그 교훈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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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와인 모임

피아니스트 친구가 새로 피아노 학원을 열면서 하우스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저는 선약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친구가 아쉽다면서 몇몇 사람들과 와인 모임을 진행하니 같이 보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중식당에서 나오는 코스에 맞춰 가져온 와인을 마시는 모임인데, 친구는 아끼던 샹볼 뮤지니 와인을 들고 왔습니다. 2016년 빈티지라 처음 개봉했을 때는 제대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다 다른 와인을 마신 후 시간이 지나자 풍부한 향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인테리어 업체 대표님은 오스트레일리아 시라즈를 가져오셨는데, 밸리 플로어 시라즈로, 밸런스가 잘 잡힌 좋은 와인으로 느껴졌습니다. 과일향도 풍부하고, 특히 고기와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포트와인을 가끔 사는데, 이번에는 전에 잘 보지 못했던 OSBORNE의 루비 포트와인을 가져갔습니다. 일반적인 포트와인들에 비해 단 맛이 조금 더 강하고, 깊은 향은 덜 했습니다. 하지만, 기름진 느낌이 들어 달기만 한 것보다는 다소 나았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친구 덕분에 밤안개가 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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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법인과 국내법인의 합작회사 설립 자문

몇해 전 사법연수원 동기의 오빠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대표인 법인이 유럽의 법인과 조인트벤처로 한국법인을 설립하고 싶은데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연수원 동기는 사내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기에 저를 소개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의뢰인이 함께 합작회사를 설립하려고 한 유럽의 S법인은 역사가 오래된 최고급 남성 맞춤복 기업이었습니다. 유럽을 기반으로 한 회사답게 본사는 벨기에, 공장은 영국, 디자인 연구소는 이탈리아에 있고, 경영진도 출신국가가 이탈리아, 독일 등 다양했습니다.

일단 쌍방의 이해당사자가 있는 설립계약이어서 정확히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어느 범위까지 자문을 할 것인지에 대해 확정을 했고, 그 부분이 정해진 후에는 LOI(거래의향서) 작성부터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한국 법인 대표님과 의논을 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해서 전달하도록 했지만, 급한 경우에는 벨기에 본사의 재무이사와 직접 이메일을 통해 계약내용을 확정하기도 했습니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벨기에 상법 등 현지 관련법령도 함께 확인했는데, 우리 법령과 법적 의미를 다르게 규정하거나 상관습이 다른 경우도 있어서 특히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상대법인을 이해시키는데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 주식회사가 보다 일반적인데 벨기에에서는 오히려 유한회사가 일반적이어서 원하는 회사의 형태에서 서로 의견 일치가 어려웠습니다.

LOI가 마무리된 후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본 계약 체결을 할 시점이 되었는데, 상대방이 기존에 체결된 LOI를 그대로 본 계약 내용으로 하자고 하여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LOI 중 일부 내용은 다소 불완전하거나, 불공정한 내용이 있어서 본 계약시 논의하기로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체 LOI 중 일부 내용을 보완하기로 하면서 모든 설립 관련 자문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설립된 S한국법인은 실제 점포를 개설하기까지 인테리어 공사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서 벨기에 법인과 다시 협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다행히 잘 수습을 하여 점포를 개설하고 역동적으로 국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현재도 S한국법인 대표가 된 대표님과 계속 교류하면서 간단한 법률 상담을 하기도 하고,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점포에서 대표님과 함께 지인들을 초대해 와인을 마시면서 교류회를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도 기성복이 아닌 남성 맞춤 정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니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본사처럼 한국법인도 계속 성장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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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제가 이주민과 난민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4년 대한변호사협회의 난민구금 TF에 참여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당시 난민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구금되어 있는 외국인보호시설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고, 문제점들이 있으면 개선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구였습니다.

당시 외국인들이 구금되어 있는(출입국관리법은 보호라고 규정하지만, 실질은 구금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 보호시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난민과 외국인들의 국내 체류 상황을 확인하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 결성된 대한변호사협회의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단장으로는 드물게 대형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를 맡고 계셨던 정인진 변호사님이 취임하셨습니다. 사실 당시 많은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위원들은 단장님은 이름만 걸어놓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쁘신 중에도 의외로 활발하게 법률지원단을 이끄셨고, 덕분에 피난처, 난센 등과 함께 난민들의 난민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3년여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지원단의 위원들이 다수의 난민사건들을 담당해 소정의 성과를 내던 중 대한변호사협회의 방침이 변경되면서 결국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이런 형태의 법률지원변호사단이 다시 결성되어 진정으로 박해를 피해 찾아온 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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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철, 변호사로 의미를 남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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