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1

제가 성년이 된 후 최초로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2002년 여름이었습니다. 군대 말년 휴가를 나와서 비행기표와 여행준비를 다 한 후 제대 3일 후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서 다시 사회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행 경비는 제가 어렸을때부터 모았던 돈으로 준비했는데, 대학생이다보니 돈을 아껴쓰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저렴한 한인민박집에 자주 묵었는데, 혼자 여행을 하던 때라 예약을 잘 하고 다니지 않아서 방이 없는 경우에는 소파에서 절반 정도 숙박료만 주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럽배낭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도시와 국가를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을 잘 하는 것으로 쳐주던 시절이라, 45일 되는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을 이른바 반시계 방향으로 열심히 여행했습니다.

제가 유럽에 도착했을 때가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한 직후여서 유럽 여행 중에도 월드컵 응원을 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갔을 때는 혹시 이탈리아 사람들과 축구 얘기하다가 싸우기라도 할까봐 이탈리아 대표팀 토티가 축구를 잘 한다고 칭찬하고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처음 혼자서 간 해외 배낭여행이라 인상 깊어서 그런지 지금도 여행 당시 있었던 일들이 많이 떠오르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몇 가지만 적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저의 파리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망쳐놨던 파리 뒷골목 불량배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런던에서 TGV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10시 반도 안 됐는데 지하철 운행이 종료됐다면서 다 내리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왜 그 시간에 운행이 종료됐는지 의아하지만, 일단 내리라니 내렸는데 생판 모르는 지하철역으로 나와 보니 숙소와 너무 멀었습니다.

2002년에는 지금처럼 여행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이드북에 의지해 여행을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숙소를 찾아가려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군대 제대 후 보름도 되지 않았던 때라 걷는 것 하나는 자신있어서 지도를 보면서 거리에 적힌 도로명과 맞춰가면서 대략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다 보니 지름길을 찾아간다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사거리에 젊은 애들 여럿이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고, 그 옆 10미터 정도에는 경찰차가 경광등을 켜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당시가 여름인 7월초였는데 드럼통에 장작을 넣어 태우면서 파리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앉아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진짜 송아지만한 개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ㅎ

어쨌든 나는 얼른 숙소로 가고 싶어서 동네 양아치(?) 같은 사람들을 지나쳐 경찰에게 숙소 방향을 묻고, 경찰이 알려준대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오면서 그 사람들을 지나쳐 오는데, 그 중 2명이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쟤들도 저는 집에 가려나 하고 그냥 내 갈길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2명이 저를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모퉁이를 돌면서 슬ㅉ 보니 2명이 어슬렁어슬렁 저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머리 위로 자전거 체인 같은 것을 빙빙 휘두르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좀 웃기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걷는데는 자신이 있었던 저는 만일, 내가 뛰면 그 애들도 뛸 거 같은데, 달리기가 제가 더 빠를지 장담할 수가 없어서 일단 빨리 걷기로 했습니다. 일단 옆으로 메는 가방을 몸에 바짝 붙이고, 최대한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도 따라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빨리 걷자 그 애들이 따라오는 것이 힘들었는지 갑자기 영어로 F*** y**, G** D*** 등 큰 소리로 욕을 막 하면서 저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한 직진만 했더니 결국 3분에서 5분 정도를 따라오다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좀 황당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선 좀 무섭기도 한 일이라 저는 그 다음날 계획했던 파리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바로 파리를 떠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2편에서…

 

조회수: 19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제가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연수원 동기 형이 자녀 양육권 관련해 법적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간단하게 서면을 작성해줄 수 있냐고 해서 몇번 상담을 하고 양육과 관련된 내용을 변경하는 재판과 관련해 간단한 서면 작성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1년이 좀 안 되었나 싶은데,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국민들 대다수가 그랬겠지만, 저도 왜 구조를 못한 것인지 참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정적으로는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호가 침몰하고, 열흘 정도 흐른 어느 날, 전에 제게 양육과 관련해 서면 작성을 해줄 수 있냐고 소개해줬던 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형은 제가 전에 양육권 관련해 서면을 써줬던 딸이 세월호에 탔다가 실종됐다는 말을 했고, 저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많은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맡았던 사건으로 인해 그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온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 구성 관련 이메일을 뒤져보았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배의철 변호사님과 황필규 변호사님이 법률지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직접 황필규 변호사님에게 연락해 법률지원단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저는 안산으로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고, 진도에 내려가 배의철 변호사님과 만나 현지 상황을 듣고 실종가 가족들이 머물던 팽목항과 체육관을 보고 올라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법률지원단 활동을 하게 되면서 광주, 목포와 해남에서 재판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머물면서 경찰병력, 일베들과 기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에서 CCTV를 건져올린 후에는 오창에 있는 M사에서 CCTV 복원을 위해 주말마다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기회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는 그렇게 6개월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로 진상조사단으로, 때때로 현장대응이나 법률지원단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제가 소속됐던 대한변호사협회 차원의 법률지원단은 활동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 정부의 진상조사 활동도 다양한 세력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후의 추가적인 조사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무게를 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의 실체가 완전히 밝혀져야 하고, 그 교훈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회수: 16

친구의 와인 모임

피아니스트 친구가 새로 피아노 학원을 열면서 하우스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저는 선약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친구가 아쉽다면서 몇몇 사람들과 와인 모임을 진행하니 같이 보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중식당에서 나오는 코스에 맞춰 가져온 와인을 마시는 모임인데, 친구는 아끼던 샹볼 뮤지니 와인을 들고 왔습니다. 2016년 빈티지라 처음 개봉했을 때는 제대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다 다른 와인을 마신 후 시간이 지나자 풍부한 향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인테리어 업체 대표님은 오스트레일리아 시라즈를 가져오셨는데, 밸리 플로어 시라즈로, 밸런스가 잘 잡힌 좋은 와인으로 느껴졌습니다. 과일향도 풍부하고, 특히 고기와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포트와인을 가끔 사는데, 이번에는 전에 잘 보지 못했던 OSBORNE의 루비 포트와인을 가져갔습니다. 일반적인 포트와인들에 비해 단 맛이 조금 더 강하고, 깊은 향은 덜 했습니다. 하지만, 기름진 느낌이 들어 달기만 한 것보다는 다소 나았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친구 덕분에 밤안개가 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회수: 15

벨기에 법인과 국내법인의 합작회사 설립 자문

몇해 전 사법연수원 동기의 오빠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대표인 법인이 유럽의 법인과 조인트벤처로 한국법인을 설립하고 싶은데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연수원 동기는 사내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기에 저를 소개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의뢰인이 함께 합작회사를 설립하려고 한 유럽의 S법인은 역사가 오래된 최고급 남성 맞춤복 기업이었습니다. 유럽을 기반으로 한 회사답게 본사는 벨기에, 공장은 영국, 디자인 연구소는 이탈리아에 있고, 경영진도 출신국가가 이탈리아, 독일 등 다양했습니다.

일단 쌍방의 이해당사자가 있는 설립계약이어서 정확히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어느 범위까지 자문을 할 것인지에 대해 확정을 했고, 그 부분이 정해진 후에는 LOI(거래의향서) 작성부터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한국 법인 대표님과 의논을 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해서 전달하도록 했지만, 급한 경우에는 벨기에 본사의 재무이사와 직접 이메일을 통해 계약내용을 확정하기도 했습니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벨기에 상법 등 현지 관련법령도 함께 확인했는데, 우리 법령과 법적 의미를 다르게 규정하거나 상관습이 다른 경우도 있어서 특히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상대법인을 이해시키는데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 주식회사가 보다 일반적인데 벨기에에서는 오히려 유한회사가 일반적이어서 원하는 회사의 형태에서 서로 의견 일치가 어려웠습니다.

LOI가 마무리된 후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본 계약 체결을 할 시점이 되었는데, 상대방이 기존에 체결된 LOI를 그대로 본 계약 내용으로 하자고 하여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LOI 중 일부 내용은 다소 불완전하거나, 불공정한 내용이 있어서 본 계약시 논의하기로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체 LOI 중 일부 내용을 보완하기로 하면서 모든 설립 관련 자문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설립된 S한국법인은 실제 점포를 개설하기까지 인테리어 공사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서 벨기에 법인과 다시 협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다행히 잘 수습을 하여 점포를 개설하고 역동적으로 국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현재도 S한국법인 대표가 된 대표님과 계속 교류하면서 간단한 법률 상담을 하기도 하고,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점포에서 대표님과 함께 지인들을 초대해 와인을 마시면서 교류회를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도 기성복이 아닌 남성 맞춤 정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니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본사처럼 한국법인도 계속 성장하길 빕니다.

조회수: 521

대한변호사협회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제가 이주민과 난민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4년 대한변호사협회의 난민구금 TF에 참여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당시 난민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구금되어 있는 외국인보호시설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고, 문제점들이 있으면 개선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구였습니다.

당시 외국인들이 구금되어 있는(출입국관리법은 보호라고 규정하지만, 실질은 구금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 보호시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난민과 외국인들의 국내 체류 상황을 확인하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 결성된 대한변호사협회의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단장으로는 드물게 대형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를 맡고 계셨던 정인진 변호사님이 취임하셨습니다. 사실 당시 많은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 위원들은 단장님은 이름만 걸어놓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쁘신 중에도 의외로 활발하게 법률지원단을 이끄셨고, 덕분에 피난처, 난센 등과 함께 난민들의 난민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3년여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지원단의 위원들이 다수의 난민사건들을 담당해 소정의 성과를 내던 중 대한변호사협회의 방침이 변경되면서 결국 난민법률지원변호사단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이런 형태의 법률지원변호사단이 다시 결성되어 진정으로 박해를 피해 찾아온 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조회수: 17

금천구청 법률상담

저는 매월 첫번째, 세번째 월요일 오전에 금천구청에 가서 금천구민들을 상대로 법률상담을 합니다.

제가 금천구청에서 법률상담을 하게 된 것은 저의 어린 시절 중 가장 긴 시간을 과거 구로구였던 현재 금천구 시흥동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들이 시흥동 무지개아파트, 럭키유치원, 문백초등학교, 안천중학교에 남아 있기에 제가 성장했던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부터 시작한 법률상담이 햇수로는 7년 정도 되었는데, 처음에는 법률상담을 하는 변호사가 2명밖에 없어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제가 법률상담을 시작하고 얼마 후 구청에서 홍보를 했더니 처음에는 7, 8명 내외였던 상담자가 많을 때는 15명씩 몰려오는 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원래 금천구청 법률상담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로 정해져있는데, 너무 상담 신청자가 많아서 때로는 점심시간에도 끝내지 못하고 1시까지 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2시간 동안 15명을 상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상담시간을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12시에 끝내는 것으로 조정하고서야 간신히 상담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 3년 정도 지나 금천구에 개업을 한 다른 변호사들이 추가적으로 법률상담을 맡게 되면서 다시 상담인원이 기존의 7명 정도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받고자 하는 분들도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덜게 되었고, 저도 상담하는 도중 밖에서 초조하게 저를 쳐다보고 계시는 상담자들의 눈초리를 덜 받게 되어서 마음이 좀 놓이게 됐습니다.

원래 저의 목표는 제가 시흥동에서 살았던 최소 10년 정도는 금천구청에서 상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햇수로 7년 상담을 해왔고, 상담을 한 분들은 대략 1,5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는 경우 가장 좋은 점은 기존의 진행상황을 상담하는 변호사가 안다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같은 분이 3, 4번씩 진행상황에 따라 상담을 하러 오기도 합니다.

구청에서 상담을 하시는 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나 간단한 사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시청이나 구청, 법률구조공단의 무료 상담을 이용하시는 것이 때로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제 사무실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에게는 제 시간과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 당연히 상담료를 받지만, 구청에서 하는 상담의 경우는 봉사의 의미로 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상담을 통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는 분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조회수: 15

음악이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서구 클래식 음반들

서구 클래식 음악은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이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락음악과 헤비메탈을 들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었고,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오히려 풍물패에 들어가 우리 전통 음악인 풍물을 연주했습니다. 제가 다시 다시 서구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 것은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계속 시험에 불합격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시험으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시험 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클래식 음악을 듣는 시간도 늘어났고, 클래식 음악을 어느 정도 듣다 보니 다양한 작곡가의 여러 장르 곡들에 관심이 생겨 관련 도서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고로 스피커, 앰프 및 CD플레이어까지 사서 음악을 듣게 되었고, 클래식 음반을 400장 가까이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후에는 전처럼 자주 듣지 않았는데, 요새 다시 음반에 손길이 가게 됩니다.

조회수: 611

와인 한 방울의 달콤함

다양한 와인과 와인 소모품들

군대를 제대하고 3일 만에 비행기를 타고 떠난 유럽에서 만난 와인은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존재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냥 술은 술인 줄만 알던 저에게 술에 단지 알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노력과 자연의 손길이 합쳐지면 그 곳에 삶이 있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 소믈리에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역시 와인은 식품이라 너무 무겁고, 어렵게 다가갈 것이 아니라 일단 많이 마셔보는 것이 최고입니다.

단, 자기 주량껏…

조회수: 16

내 여행의 동반자들

여행가방들과 여행용품들

가장 왼쪽의 등산배낭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짊어지고 국내외를 누비던 시절에 함께 했습니다.

이베이를 통해 캐나다에서 중고품으로 구매했는데, 신품같이 깨끗해서 좋았고, 일단 배낭을 짋어지면 무게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에 밀착이 되어서 감탄했습니다.

최근 해외여행에 가지고 다니는 가운데 여행용 캐리어는 등산배낭을 메고 다니다보니 무리가 되어서 이제는 짐을 끌고 다녀야 되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구입했습니다.

짧은 여행시 가지고 가는 오른쪽 작은 배낭은 사법시험 준비하던 시절 책가방이었는데 이제는 짧은 여행의 동반자로 쓰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가벼워서 때때로 등산을 할 때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조회수: 516

포장마차 식칼과 살인 미수

사법연수원생들은 보통 연수원 2년차에 검찰, 법원 및 법무법인 등에 실무수습을 위해 시보를 나가는데, 제가 서울의 한 법원에 시보를 할 당시 국선변호인으로 변호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변호인으로는 처음 맡은 사건이어서 더욱 기억이 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건 당시 제가 맡았던 사건의 피고인은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조리를 하던 중 술에 취한 손님이 시비를 걸자 귀가하라고 3, 4차례 계속 돌려보냈는데도 손님이 포장마차 밖에서 계속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말리려고 포장마차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이 포장마차에서 나올 때 조리 중이라 무의식 중에 식칼을 들고 나왔는데, 손님을 돌려보내고 돌아서서 포장마차로 돌아오던 중 손님이 오히려 피고인을 쫓아와 폭행을 당하게 됐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손님을 제지하려고 부둥켜 안는 과정에서 손님이 식칼에 복부를 찔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피고인으로서는 매우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경찰은 피고인을 살인미수로 체포하고, 검사는 중상해로 기소한 후 살인의 고의까지 주장한 사건인데, 당시 사법연수생인 제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살인미수로 긴급체포되어 구속된 피고인을 접견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피고인의 상황 설명을 듣고보니 피의자 신문조서 및 참고인 진술조서 내용이 서로 모순되고, 피고인이 왼손잡이여서 검사가 주장하는 공소사실과 같이 피해자의 상처부위를 찌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그렇게 변론을 했습니다.

다행히 제 변론이 받아들여져 피고인의 살인의 고의까지는 인정되지 않고, 피고인은 다행히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이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피고인이 고맙다면서 자신의 여자친구와 같이 식사를 하자고 찾아왔는데, 함께 식사를 한 후 명품 넥타이를 선물이라며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고맙지만 국선변호인이라 추가적인 금전이나 금품은 받을 수 없다면서 선물은 거절하고, 앞으로 두 분이 혼인을 하신다니 축하의 의미로 내가 식사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미안해서 계속 그럴 수는 없다고 하던 피고인이 고맙다면서 나중에 자신의 포장마차에 찾아오면 안주를 잘 대접하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었습니다. 저는 이후 피고인이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있었던 곳 주변을 지나가면 그 약속이 생각나 한번씩 찾아보곤 했는데 이상하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피고인의 여자친구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은 피고인이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제가 국선변호를 맡았던 1심 이후 항소심에서는 판단이 달라져 실형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교도소에서 사건 당시 다쳤던 다리의 증상이 악화되고, 출소 후에도 몸이 불편해 병원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자친구와 혼인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비통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왔던 피고인이 하늘에서라도 아무런 걱정없이 안식을 얻었길 빕니다.

조회수: 517

양희철, 변호사로 의미를 남기는 삶
Privacy Overview

This website uses cookies so that we can provide you with the best user experience possible. Cookie information is stored in your browser and performs functions such as recognising you when you return to our website and helping our team to understand which sections of the website you find most interesting and use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