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남편에서 형으로…

지난 주말 저녁에는 매형이 20세 이하 월드컵 경기를 함께 보자고 해서 누나집에 놀러 갔습니다. 하루 종일 변호사회에서 연수 강의를 듣고, 8시 정도 되어서 누나집으로 향했는데 도착하니 에어 프라이어로 삼겹살을 굽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 했습니다.

월드컵 결승전도 있었지만 얼마 전 매형이 직장에서 이사가 되어 축하의 의미로 와인 한 병을 가져가 누나까지 3명이 함께 나눠 마셨습니다. 미성년자인 제 조카는 오렌지 주스로 만족했습니다.

매형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저와 누나가 많이 친한 것을 알고, 결혼하기 전 누나를 뺏기는 것이 아니라 형이 하나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했는데 그 말처럼 지금까지 형처럼 저를 챙겨줬습니다.

제가 갑자기 혼자 살게 됐을때 불편할텐데 집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도 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시절에 누나와 반찬을 준비해서 신림동까지 갖다주면서 힘을 북돋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자신이 경제적으로 여유있어 한 것이 아니어서 더욱 고맙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누나와 결혼할 당시 둘 다 대학원생이어서 어렵게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이후 급여가 박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혼기념일에 누나가 좋아했던 캣츠 뮤지컬 티켓을 사다줬는데, 누나로부터 생활비가 필요해 티켓을 다시 팔았다는 얘기를 듣고 매형은 가족들도 챙기지 못하면서 뭘하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기자 생활을 접고, 학원 강사가 되어 부단히 노력해 이제는 유명한 강사가 되어 이사까지 된 겁니다.

제가 가끔 제 누나와 결혼해줘서 고맙다고 농담도 하곤 했는데, 지난 주말엔 매형과 침대에 누워서 결혼 전 했던 얘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형이 돼줘서 고맙다고…

조회수: 19

서울시 조합운영 실태점검 외부 전문가 위원 활동

우리나라에는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활발한 편인데, 서울시에만 진행 중인 재개발, 재건축 정비사업구역이 300여 곳 이상 됩니다. 저는 2015년부터 서울시 외부 전문가 위원으로 조합운영 실태점검에 참여했으니, 이제 5년 정도 된 셈입니다.

처음 서울시에서 조합운영 실태점검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조합들이 총회와 대의원회를 거치지 않은 채 계약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계약서도 없었습니다. 자료들을 보다 문제가 있다 싶어 회의록이나 속기록을 달라고 하면 자료가 없는 경우도 많고,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떤 자료를 근거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주일 또는 2주일 정도 점검을 하게 되는데, 조합 업무와 관련해 반드시 법리적으로 문제되는 부분만이 아니라 실무적으로 문제되는 절차나, 계약 내용과 관련해서도 내용을 살펴보게 됩니다.

서울시에서는 끊임없이 법적 분쟁이 발생하는 재개발, 재건축 조합에 대해 지속적으로 점검에 나서면서, 업무 처리 기준과 관련해서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령 및 서울시 도시환경정비조례를 더욱 구체화한 표준 예산회계규정, 표준 행정업무규정, 표준 선거관리규정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이후 조합들이 총회 의결을 거쳐 위 표준 업무처리 규정들을 도입하면서 조합 업무의 절차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처리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5년 동안 점검을 나갔던 조합들이 30여 곳이 넘는데, 이제는 전반적으로 처음 점검을 시작했던 2015년보다 많은 것들이 체계가 잡히고, 필요한 절차들을 준수하려고 하는 부분이 보이곤 합니다. 기존에 업무 처리의 기준이 불분명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있었는데 표준 업무처리 규정들과 조합점검 결과의 공유 덕분인지 이전보다 개선된 부분이 많이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부 조합에서는 비리가 계속되고 있고, 서울시에서는 실태점검을 나갔던 조합에 다시 재점검을 나가기도 하면서 비리 발생의 여지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6년부터는 국토부과 서울시가 매년 합동점검을 진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울시가 점검을 할 때는 서울시청 직원 1명, 변호사 2명, 회계사 2명, 해당 자치구청 직원 1명이 한 팀을 구성하는데 반해, 국토부와 합동점검시에는 기술사들과 한국감정원 직원들까지 함께 점검을 나가서 설계 및 시공계약 관련 부분까지 더욱 세심하게 점검하기도 합니다.

기존에 참여했던 점검들에서 지적된 사항들 중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서울시에서 향후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수사의뢰를 하기도 하는데,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도시정비법 관련 내용과 실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처벌이 잘 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재개발, 재건축 조합의 문제는 수백, 수천명에 달하는 조합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조합 스스로도 이러한 점을 인식해 자정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조회수: 517

달콤한 고수익의 유혹과 유사수신행위

우리가 소위 피라미드 사기라고도 부르는, 피라미드 조직을 만들어 투자금을 모집한 후 부당이득을 얻고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안기는 행위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또는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유사수신행위의 피해자를 대리해 손해배상소송을 하기도 했고, 유사수신행위의 피의자를 변호한 적도 있는데 그러한 구조를 떠받치는 바탕에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폰지 사기(Ponzi scheme)이라고도 부르는 실제 이윤 창출 없이 투자자들의 투자금으로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인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미한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구조는 보통은 투자 권유를 하면서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보다 매우 큰 수익을, 제3자가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큰 수익을 약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면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사업구조를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대리했던 손해배상청구 사건은 의뢰인이 종교 공동체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게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던 경우인데, 처음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투자 권유를 받고 소액을 투자했더니 실제로 몇달 많은 수익을 받게 되자 투자금액을 점점 늘렸다가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해 큰 손해를 본 사례였습니다. 자신의 기대보다 큰 수익을 받게 되자 욕심이 생겨 자신들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도 함께 투자를 하자고 하여 더 큰 손해가 난 경우였습니다.

당시 투자했던 사람들이 수천명에 달하고, 피해액만 수백억에 달한 사건이었는데, 결국 피라미드 조직의 핵심 간부들은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의뢰인은 자신에게 투자를 권유했던 핵심 간부의 부인에게 손해배상청구를 한 것인데, 실제로는 그 부인도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형사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제 의뢰인은 쉽지 않은 소송이라는 설명에도 자신의 손해를 전보받기 위해 민사소송을 진행하길 원했기에 소를 제기하였으나,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데다 손해와 인과관계, 이익을 누가 얻었는지 등 입증자료가 부족해 안타깝게도 결국 손해배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언론기사에서도 전국에 수천명 피해자들이 존재한다고 했고, 제 의뢰인 말로는 피해자들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증거로 설득해야 하는 재판에서는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유사수신행위 사건을 하다보면, 유사수신행위 사건의 가해자는 때로는 그 자신이 피해자인 경우도 있고, 심지어 어떤 가해자들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피해자인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사실관계가 아닌 그 밑바탕에 있는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제출할 수 있는 증거도 별로 없고, 법원이나 수사기관에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 판단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조회수: 15

서울지방변호사회와 타이페이율사공회 교류회

지난 목요일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와 타이페이율사공회의 교류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서울지방변호사회 국제위원회 중국소위에서 간사를 맡고 있어 참석하게 됐는데, 대만과 우리나라의 변호사업 광고 규정과 관련한 내용이 발표주제였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유사한 부분이 많았고, 일부 차이가 있었는데 대만의 경우는 변호사가 광고를 하는 경우 사전에 광고 내용을 협회에 보내 심의를 받는다는 부분이 그러했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우리나라에 이런 규정이 있다면 사전검열금지원칙 위반으로 표현의 자유 침해가 되지 않을까 하고 질문을 했더니, 대만에서도 사전 심의가 문제가 되어 심의를 까다롭지 않게 하고, 최근에는 심의 자체를 받지 않는 변호사들도 많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난 후에는 방한한 타이페이율사회 임원들과 만찬을 함께 했는데, 우리나라와 대만의 변호사업계 현황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방한한 임원들 중 노동법을 주된 업무범위로 하는 변호사들이 2명 있어 산재사건에 대한 얘기도 나눴습니다.

특히 만찬 테이블 옆자리에 앉았던 토니 탕 이사는 일본에서도 유학을 해서인지 영어가 유창해서 1시간 가까이 식사를 하면서 대만을 여행한 얘기나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토니 탕 이사의 아버님도 변호사셨는데, 과거 독재정권 시절 판사를 하다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낸 후, 변호사를 거쳐 의원으로도 8년 정도 활동하셨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부분이 많음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교류회가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친해진 토니 탕 이사와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했습니다. 저보고 대만에 오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며 헤어졌습니다. 외국인이라도 짧은 시간 내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조회수: 16

혐오를 내뱉는 자들과 우리 사회의 대응

이희호 여사가 며칠 전 9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았던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매진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기도 했던 이희호 여사는 죽음을 앞두고 국민들의 화합과 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우리 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한 이희호 여사가 떠나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조문으로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희호 여사의 마지막 바람마저도 외면하고, 마지막 길에도 조롱과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렇게 혐오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려고 하는 무리나 세력들은 역사 속에서 계속 존재해왔습니다. 그들은 혐오라는 독을 내뱉으면서 자신의 근거없는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알게 모르게 종사해왔습니다. 그런 무리 중 10여년 전부터 자주 들리는 단어가 일간베스트, 줄여서 ‘일베’라는 사이트 이용자들일 것입니다.

일베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들어보기만 했던 제가 일베 무리들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유가족 법률지원단으로 활동하던 중 광화문에서 유가족의 단식농성장에 현장대응반으로 대기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은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게 된 사실관계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면서 광화문 광장에서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궈 그 열기가 광화문 농성장을 감싸고 돌던 오후, 일베가 이른바 ‘폭식투쟁’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돌연 농성장에 전해졌습니다. 그 전에도 한번 일베가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유가족들을 조롱하기 위해 단식농성장 옆에서 피자와 치킨을 나눠먹는 ‘폭식투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제가 광화문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알지는 못했고, 언론 기사를 통해서만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광화문에서 지원활동을 맡은 날 일베가 온다고 하기에 저는 유가족분들과 자원활동가들에게 물리적 충돌이나 폭언 등 일베가 유도하고자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당부를 했습니다. 

일베가 모이기로 했다는 오후 5시 정도 되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 정도 되는 청년과 소년들 무리가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햄버거 봉지를 들고 있고, 다른 사람은 치킨 박스를 들고 있기도 했는데, 유가족들이 단식농성을 하는 천막 근처로 무리지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병력과 자원활동가들이 무슨 용무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접근을 막기 시작했고, 저 역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제가 다가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니, 한 청년은 광화문 광장에 김밥 먹으러 왔는데 음식 먹는데도 무슨 허락을 받아야 되냐고 반문하기에, 그럼 저 옆에 있는 의자에서 먹는 것이 어떻냐고 했더니 자기가 먹고 싶은 곳에서 먹겠다면서 단식 농성 천막 바로 뒤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을 본 자원활동가들이 뭐하는 거냐면서 언성을 높이자,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병력이 다가와 가운데서 차단하면서 그 청년을 옆에 있는 의자로 가도록 했고, 결국 그 청년은 그 의자에서 김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자원활동가들과 유가족들에게 저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화내고 물리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옆에서 치킨 박스를 들고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3, 4명의 청년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떤 사람은 안양에서 왔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왜 알려줘야 하냐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옆에 있던 경찰관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이 사생활을 침해하는 불법적인 것이 아니냐는 황당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날은 처음 폭식투쟁 후 여론의 뭇매를 맞은 후라 그런지 우려했던 것보다는 적은 인원이 온 것으로 보였는데, 저는 그래도 그들의 생각이 알아보려고 뭔가 대화를 해보려고 했지만, 계속 말꼬리만 잡고 늘어지거나, 자신들이 왜 왔는지는 숨기고 그냥 음식을 먹으러 왔다면서 우리나라에 그런 자유가 없냐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은 나치 돌격대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백색테러를 저질렀을 당시 돌격대는 그 선봉에서 활동을 했고, 그 구성원들은 사회 현실에 불만을 품은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이른바 ‘폭식투쟁’이란 것을 하고 있는 저들이 지금 사회에 가지고 있는 불만은 어떤 것이고,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방법이 진정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궁금했고, 자신들이 누군가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묻고 싶었습니다.

나치 돌격대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그 세련되지 못한 폭력성을 계속 노출했고, 이제는 그런 모습이 부담스러워진 히틀러에 의해 수백명의 간부들이 즉결 처형되는 등 숙청됨으로써 그 효용을 사실상 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비추는 거울인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잊은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이 누구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조회수: 16

정부와 싸운다는 것

오늘은 한달에 한 번 서울시 마을변호사로 상담을 하는 날이었는데, 주민센터에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이 저에게 자신이 기억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전에 오셨냐고 답하면서 언제 오셨냐고 물었더니 1년 전에 왔었다면서 자신이 아니라 오빠의 사건 때문에 왔었는데, 1년 동안 재판을 받고 다시 상담을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담자가 하는 얘기를 듣다보니 전에 들었던 사연이 생각났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공무집행방해 사건이었습니다. 술을 마신 오빠가 인도에서 길을 막고 다른 사람을 체포하고 있었던 경찰관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전에 상담하면서 무죄를 다투고 싶다고 하기에 목격자 진술을 확보해 대응하라고 했는데, 실제 공판에서는 재판장이 주변에서 상황을 본 가게 주인의 진술은 배척하고, 동료 경찰관의 진술을 믿어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찰관이 상황을 오해하고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의뢰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상해를 입힌 것과 관련해 국가배상청구 사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많이 느낀 바 있습니다.

일단, 법원은 경찰이나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판사 스스로가 보통 법을 잘 지킬 뿐 아니라, 같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동료의식이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아가 설령 그런 잘못을 했더라도 국가재정을 생각하면 배상까지 인정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도 보입니다. 다른 변호사들과 얘기하다보면 종종 판사가 법 해석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넘어 국가재정을 지키는 수비선수 역할을 자임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관계 확정에 있어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이 인간인 판사로서도 쉽지 않겠지만,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고도 하는 판사들은 이러한 세간의 의심마저도 잘못된 것이었다는 깨닫게 해주는 판결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는 각 동별로 마을변호사가 있어서 법적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사안이나, 경제적으로 법률 상담료를 지급하기 어려운 분들은 한번 이용해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조회수: 16

종교적, 정치적 박해로 인한 인도적 체류 허가

제가 국내에 체류하는 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구성했던 난민구금 TF에 참여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처음 수행했던 사건은 2013년말부터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종교적,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신청을 하였는데, 증거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은 난민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난민신청자는 난민신청이 거부되어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었고, 화성외국인 보호소에 보호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은 이전부터 난민소송 조력을 해오셨던 공감의 박영아 변호사님과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와 함께 진행했는데, 국적국의 주류 민족이 소수민족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데다가 서로 종교도 달라 제 의뢰인이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제 의뢰인에게 종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고, 사원을 파괴하는 등 박해의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이에 제 의뢰인은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였다가 정부의 눈을 피해 우리나라로 피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의뢰인의 난민지위인정 신청이 거부되었고, 행정소송 1심과 항소심에서도 증거가 부족하고, 여권에 기재된 성명의 동일성 여부가 문제된다는 이유로 패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 의뢰인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3년 가까이 보호(사실상 구금)되어 있었는데, 자신이 겪는 시련도 신이 내린 것이라면서 50이 가까운 연세인데도 인내심을 갖고 잘 견뎌내었습니다. 또한, 제가 면회를 가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힘들텐데도 항상 웃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해서 종교인이라 뭐가 다르기는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후 저와 박영아 변호사님은 의뢰인과 의논해 난민신청을 다시 하기로 하였고, 다행히 이의신청 단계에서 법무부 난민위원회가 난민지위는 인정되지 않지만 국적국으로 귀국시 박해의 위험은 있다며 인도적 체류허가는 허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제 의뢰인은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후 외국인보호소에서 보호해제되어 제 법인 사무실 앞까지 오셨는데, 가장 먼저 한 얘기는 너무 고맙고 제게 신의 은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외국인보호소 밖에서 보니 더 반갑다고 축하인사를 건넸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유엔난민기구(UNHCR)과 난민지원단체에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제 의뢰인은 이후 난민지원단체에 잠시 머물다가 종교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있는 종교시설로 옮겨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동안 제 의뢰인의 국적국 국가정황이 호전되어 제 의뢰인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되어 제 의뢰인은 앞으로도 국적국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회수: 16

북한산 의상능선 산행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등산 동호회 산행에 참여했습니다.

북한산은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산인데, 어렸을 때나 대학원에 다닐 때 몇번 올랐던 산입니다. 대학원에서 강의를 들을 때는 한 교수님이 해당 과목의 전통이라고 하시면서 토요일 오전에 정독도서관에서 세미나를 하고, 오후에는 북한산 등산을 하셔서 몇번 따라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북한산 등산로

등산 동호회분들은 역시 베테랑들이시라 그런지 평이한 등산로가 아닌 처음 듣는 의상능선이란 등산로를 타고 오르게 되었는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안내판에 있는 등산로 난이도를 보고 예상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른 길은 저 노란 길도, 녹색 길도, 붉은 길도 아닌 시작하자마자 새까만 그 길이었습니다. 처음 1/3은 매우 어려운 검은색, 그 뒤는 1/3은 어려운 자주색, 다시 1/3은 매우 어려운 검은색…

오랜만에 시작하자마자 급경사를 밧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하니 운동을 하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는데, 몇 시간을 그렇게 걷다보니 나중에는 다리에 힘이 좀 빠졌습니다. 더구나 절벽에 있는 밧줄을 잡고 계속 오르다보니 다리힘보다는 팔힘으로 오르면서 균형이 잘 안 잡혀 순간적으로 휘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구간을 지나 주변 경치를 살펴보니 왜 의상능선이 북한산 최고 절경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3개의 봉우리는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이고, 바위 사진은 토끼 바위라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토끼가 돼지랑 뽀뽀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등산하기에 날씨도 딱 좋고, 하루 전에 내린 비로 계곡에 물도 있어서 하산하는 길에는 즐거운 물소리를 들으면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조회수: 16

제권판결에 대한 불복의 소 사건

제가 변호사가 되면서 다양한 사건을 해보고 싶었고, 실제로 다양한 사건들을 다뤄봤지만, 솔직히 제권판결에 대한 불복 사건을 하게 되리라고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건 의뢰를 받기 전에는 제권판결과 관련된 내용이나 법적 절차도 상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제권판결이란 유가증권이 도난, 분실 등 사유가 있는 경우 법원의 판결로 그 증권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인데, 제 의뢰인이 이전에 인수한 유가증권에 대해 발행인이 이전에 제권판결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발행인이 제 의뢰인의 채무자가 소지하게 된 해당 유가증권을 잃어버렸다면서 제권판결을 받았는데, 위 채무자는 제 의뢰인에게 돈을 차용하면서 위 유가증권을 담보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가증권을 중간에 소지했다가 제 의뢰인의 채무자에게 배서해 양도한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그 사람의 행방이 묘연한데다 금융기관에서 개인정보라는 것을 이유로 인적사항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유가증권에 배서되어 있는 주소나 전화번호로도 배서인을 찾기가 힘들어 고민을 하다가 제가 전에 사법연수원 시보 시절 실무수습을 했던 금융감독원의 절차를 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금융감독원에는 일반 국민들이 은행 등 금융기관과 관련한 법적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민원 등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수습 당시 같이 근무했던 금융감독원 소속 직원에게 관련 내용을 문의했더니 가능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민원 서류를 작성해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법원에서 절차를 진행했더니 은행에서 급하게 관련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일단 해당 정보를 받고 난 후 의뢰인과 의논하여 유가증권을 무단으로 양도했던 사람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법적인 문제가 있으니 해결을 위해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제 사무실로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한 사람은 유가증권을 양도했던 사람의 남편이었는데 자신의 아내가 과거 유가증권을 주워 양도했던 것이 맞다고 하면서 아내가 매우 두려워한다면서 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했던 가족이 있던 아내가 유가증권을 우연히 주웠는데, 잘못인 줄 알면서도 유가증권을 돈을 받고 넘겨 수술비를 마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내는 언젠가는 그 유가증권과 관련해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10년 넘게 불안해했다는 것인데 자신에게도 내용증명을 받고서야 울면서 얘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듣고 의뢰인과 상의해서 우리의 목적은 채무자로부터 받은 유가증권의 원리금을 받는 것이 목적이지 그 유가증권을 마음대로 처분한 사람을 형사처벌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리금에 해당하는 금원을 준다면 더이상 과거의 일은 문제삼지 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이에 남편이 해당 금원을 마련해와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결국 의뢰인 입장에서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재판도 종결시키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건을 시작할 때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금융감독원의 민원 절차를 거쳐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가족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의 유가증권을 함부로 양도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로 인해 10년 넘는 시간을 불안에 떨며 살았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고, 내용증명을 받자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적인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래도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상황 때문에 한 순간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회수: 15

2002년 유럽배낭여행기 2

지난 글에 이어 군 제대 후 유럽배낭여행 당시 일화입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북유럽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 한인민박집에 머물던 어느날 저녁 6개월째 배낭여행 중이라는 형을 한 명 만났는데 다음날 백야를 보러 북극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체코 가는 기차에서 만난 할머니가 추천해준 체스키 크롬로프를 갔다가 독일에 오래 머물 생각이었는데, 백야와 북극이란 단어가 저를 너무도 강렬하게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다가 일정을 전부 변경해 그 형과 북극에 가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노르웨이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일단 체코에서 우리가 가려는 노르웨이 나르빅역까지는 기차로만 2박 3일을 가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북유럽의 물가가 어마무시하다는 얘기를 전부터 듣고 있었던 우리는 일단 일용할 양식을 사서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커다란 식빵 2봉지, 2리터짜리 생수 2통, 살라미 1개, 딸기잼 작은 병, 맛있는 체코 맥주 5병(아무리 돈이 없어도 맛있는 체코 맥주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음)을 사서 기차에 탔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여행한 얘기도 하고, 빵에 잼을 바른 후 살라미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꼬박 기차를 타고 스웨덴 국경을 통과해 올라갈 때가 되니, 점점 지루해지고 식빵만 먹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더구나 스웨덴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아 크로네만 사용할 수 있어 스웨덴에서는 물건도 전혀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스톡홀름에서 사철(사기업이 운영하는 기차)을 타고 나르빅에 가는데, 문제는 유레일 패스로 기차를 탈 수는 있는데 좌석 예약은 불가능해서, 좌석이 없는 경우 서서(!!)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야 어찌어찌 타고 가더라도 문제는 밤에 잠을 잘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동행한 형과 저 모두 한창 젊은 나이라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객실에는 자리가 없으니 승하차하는 계단이 있는 복도에 침낭을 깔고 자기로 했습니다. 당시 기차에 타고 내리는 다른 승객들이 좁은 공간에서 한국인 2명이 침낭에 들어가서 계단을 피해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지 지금도 궁금하긴 합니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기차만 타고 도착한 노르웨이 나르빅은 유럽 최북단 기차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로포텐 제도까지는 다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기차에서 내렸는데, 저 앞에서 왠지 한국인 같은 여성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배낭을 메고, 하나같이 머리에 천으로 된 정글모자를 썼는데, 당시 유럽에서 그런 모자를 쓴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까지 오는 다른 한국인들도 있구나”하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하고 보니, 그 분들은 학교 선생님들이었는데 그분들도 마찬가지로 로포텐 제도에 가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의기투합한 우리 일행은 함께 마트에서 연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연어가 엄청나게 비쌌는데, 거기선 연어 1마리를 살만 발라 포장한 상품이 1만원 정도 였음)를 비롯한 식료품을 사서 유람선을 탔습니다. 북해의 찬 바람을 가르고 로포텐 제도에 도착한 후 백야를 보면서 연어로 스테이크도 굽고, 샐러드 해 먹고, 연어 라면도 끓여먹은 후 캐러밴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북해의 바람을 가르며 로포텐 제도로 가는 유람선에

백야에는 새벽 3시 정도까지 온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데, 그 시간이 지나 5시 정도면 어두워지기보다는 하늘이 다시 밝아지면서 새벽이 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백야라도 잠을 자야하니 아주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잔다는데 우리는 백야를 감상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다음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계속 졸아야 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는 원주민들이 벼룩시장을 열기도 하는데, 거기 걸려 있는 하얀 북극여우 가죽을 16만원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원주민들에게만 사냥을 허용한다는데 어머니 선물로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제 입장에선 비싸기도 하고, 올무로 잡느라 여우 발 하나가 없어서 마음이 좀 그렇기도 해서 결국 사지는 못했습니다.

로포텐 제도에서 나와서는 게이랑게르 피요르드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유람선을 쫓아오는 갈매기들에게 빵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영종도 가는 유람선에서 던져준 새우깡을 잘 받아먹는 우리나라 갈매기들처럼 노르웨이 갈매기들도 빵을 뭉쳐 던져주면 잘 받아먹는 것을 보고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브릭스달에서는 빙하기에 다 녹지 않은 빙하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캔디바 같은 색이어서 신기했는데, 가까이 하니 원래 하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등산하다가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는 것처럼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다른 여행객이 그 물에 수만년 전 빙하에 들어갔던 박테리아가 있을지도 모르니 마시지 말라고 해서 얼른 뜬 물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계곡 위로 올라가니 빙하 조각이 떨어져 나와 물에 둥둥 떠있길래 제가 얼른 위에 올라탔는데 빙하가 밑으로 쑥~ 가라앉았다가 다시 위로 떠올라서 주변 여행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여행을 하는 동안 정부가 카페, 유랑선, 마트 등 사방에 설치해 놓은 슬롯머신을 보면서 무료한 삶에 대한 위안거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바로 앞에서 2번이나 큰 금액이 당첨되어 마트 쇼핑 바구니에 동전을 쓸어담는 것을 보고 당첨확률이 높다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했던 형이 당첨 운이 있는 편이라길래 함께 돈을 모아 슬롯머신을 하기도 했는데(우린 당시 슬롯머신을 줄여 ‘땡김이’라고 부르기도 했음), 한번은 슬롯머신으로 약간의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여행경비에 충당하기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1만원짜리 빅맥세트보다 비싼 11,500원짜리빅맥세트를 파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저는 배는 다소 고프더라도 북유럽의 앞선 기술, 여유있는 삶의 태도, 수준 높은 공공인프라 시설에 감탄하고, 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회수: 16

양희철, 변호사로 의미를 남기는 삶
Privacy Overview

This website uses cookies so that we can provide you with the best user experience possible. Cookie information is stored in your browser and performs functions such as recognising you when you return to our website and helping our team to understand which sections of the website you find most interesting and useful.